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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 [문화와사람]
아들과 함께 발레의 길 가는 백의선 교수
최정학 기자(2004-11-09 12:25:49)
백조가 호수위에 우아하게 떠나닐 수 있는 이유 1909년 5월 18일, 러시아의 셍 피체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최고의 무용수들로 구성된 발레 륏스(Ballet Russe:러시아 발레단)의 첫 파리 공연이 있던 날, 발레 륏스를 만든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 diaghilev)는 발레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다. “오페라와 발레는 한 발짝 차이다. 발레야말로 그 자체가 모든 예술을 전부 포괄하는 종합예술이다.” 발레는 화려한 무대위에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을 펼쳐 보이는 예술이다. 그 몸짓은 때론 단순한 아름다움만을 위해 존재하기도 하지만, 또 때론 수많은 언어들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발레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표현해 낸 것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발레를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발레 동작 하나하나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모르면 감상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동작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으려다보면 절대 발레를 감상할 수 없어요. 전체적인 동작의 선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그냥 느껴야죠. 음악 악보도 하나하나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이것들이 서로 모여서 선율을 만들고 화음을 만들어 낼 때 음악이 되는 거잖아요. 사실 아무런 의미 없이 단지 아름다운 동작들만 연결시켜 놓은 발레 공연도 있어요. 백조의 호수 2막 같은 경우는 약 30여분동안 순전히 백조들이 노니는 장면만을 표현해 놓은 것이기도 하구요.” 원광대학교 무용과 백의선(52)교수. 지금은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만, 그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 국립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남자 발레 무용수)였다. 그가 했던 역할들도 만만치 않다. 1978년 국립발레단 제 22회 정기공연 ‘코펠리아’의 주역을 시작으로, 23회 정기공연 ‘신데렐라’의 왕자 역, 24회 정기공연 ‘호두까기 인형’의 왕자 역, 26회 정기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역 등을 비롯해, 국립발레단 무용수로서 마지막 공연인 제 32회 정기공연 ‘Chopin Concerto for Piano’의 주역까지 그가 국립발레단의 단원으로 있던 기간에는 거의 모든 공연의 주인공을 도맡았다. 그가 발레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조금 엉뚱하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했던 운동은 태권도였고, 자연스럽게 그는 태권도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태권도 체육특기자 입학은 쉽지 않았다. 이미 여러 태권도 대회에서 수상 경력을 갖고 있는 지원자들이 수두룩했고, 지금은 녹차밭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오지에 속했던 보성 율어에서 나고 자라 태권도 대회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그가, 그들 틈에 낄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때, 그에게 조선대학교 무용과 학장이 발레를 권유한다. 당시에만 해도 무용과라고는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가 유일했다. 경쟁률도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무용하는 남자가 드물어서 뽑았겠죠. 지금은 동아콩쿨, 신인콩쿨 등 대회도 많고 각 대회마다 입상자 3명씩에게 군 면제를 해주기 때문에 남자 경쟁률이 치열하지만, 그때는 남자가 무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태권도를 하던 그는 발레리노로 극적 변신을 하게 된다. 부모님에게는 학교 졸업 후에 선생님을 할 수 있다는 ‘당근’으로 허락을 맡게 된다. 졸업 후, 그 앞에 놓인 길은 국립발레단 단원이라는 것이었다. 졸업식과 국립발레단 시험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무작정 서울에 상경, 당시 국립발레단의 임성남 단장을 만나 이루어진 파격적인 채용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발레는 가장 아름다운 몸의 선을 보여주는 예술이에요. 하지만, 단 한 차례의 공연에서 깃털처럼 우아한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죠. 훈련을 할 때에는 정말 목이 말라붙어서 숨을 잘 쉬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요. 아침에 연습실에 가서 Barre(몸을 풀기위한 봉) 앞에 설 때마다 이걸 또 해야하나 하는 괴로움이 정말 컸죠.” 그에 설명에 따르면, 발레 자체가 그것의 주된 레퍼토리 중 하나인 ‘백조의 호수’를 닮았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가, 사실 물 속에서는 쉴 사이 없이 발길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우아한 손동작 하나 뒤에는 엄청난 훈련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된 연습과정을 공연이 있을 때마다 길게는 3개월에서 6개월까지 감내해야 했다. “공연 연습할 때는 계단을 3개 이상 올라가질 못했어요. 허벅지 안쪽이 시커멓게 멍이 들 정도로 연습을 해야 했으니까요. 한 여름에도 몸을 풀기위해 연탄불을 때면서 잤어요.” 그의 아들 백종훈(27)씨도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서울에 있는 백종훈씨는 경희대에서 발레를 전공한 후,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국립발레단의 연습생으로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따라가는 것이 어떤 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기대만큼 안 되면 두 배는 더 화가 나더라구요. 처음엔 솔직히 욕심이 많았죠.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꽤 잘했거든요. 하지만 군대가서 발도 다치고 하면서, 한때는 얼굴만 보면 발레 하지 말라고 한 적도 있어요.” 자신보다 자식이 더 잘되길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소망일 터, 그도 자식이 자신보다 훌륭한 무용수가 되길 바랬다. “발레는 수도승 같이 해야만 잘 할 수 있는 겁니다. 매일 몸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조금만 연습을 게을리하면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한 과목 점수가 너무 엉망이더라구요. 연습도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구요. 그날로 병무청에 입대 신청 전화를 했어요. 아마 제대 후에 일취월장한 동기들의 실력을 보고 좌절도 많이 했을 겁니다. 지금은 스스로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저도 일체 간섭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하라고 맡기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도와주는 길 같더라구요.” 그는 지난해와 올해 아들을 ‘백의선 발레단’의 정기공연 무대에 올렸다. 아버지는 뒤에서 무대를 총괄하고, 아들은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총괄하는 무대 위에 서는 것이다. 아들이 자신보다 더 훌륭한 무용가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 이런 아버지의 시선이 못내 부담스럽기만한 아들이 ‘총 연출가’와 ‘주인공’으로 만나는 날. 무대 위에서 펼치는 아들의 몸짓은 어쩌면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보내는 화해의 몸짓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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