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4.11 | [문화와사람]
민살풀이의 대가 장금도 할머니
김선경 문화저널 객원기자(2004-11-09 12:24:12)
몸 속에 춤을 품은 사람, 장금도 할머니는 며칠째 출타 중이었다. 전화를 받은 며느리는 그냥 “서울에 갔다”고만 했다. 휴대폰도 없고 간 곳도 알 수 없으니… 속수무책으로 할머니가 군산으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만에 연락이 닿은 할머니는 서울에 살고 있는 ‘동창생’들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옛날 ‘권번’ 동기들을 그렇게 부른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이 할머니가 바로 일제시대 군산 권번을 주름잡던 장금도(76)다. 어찌하여 이름이 장금도였을까? 이름에서 천상 예술가의 기운이 느껴진다. “장금도가 내 본명이요. 원래는 ‘비단 금(錦)’자에 ‘복숭아 도(桃)’잔디… 호적에는 ‘이제 금(今)’자로 돼 있다고 그러데. 아무튼지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내 이름은 장금도 하나뿐이요.”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에게서는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열두 살 때 군산 소화 권번으로 팔려간 장금도. 사촌까지 12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홀어머니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권번은 기생들의 교육기관이었다. 그곳에서 춤과 소리를 배웠다. 장금도의 춤은 소화 권번은 물론 군산 일대에서 으뜸이었다. 소리를 못했다기보다는 춤이 월등히 뛰어난 탓이었다. 기러기춤으로 유명한 도금선의 눈에 띄어 물집이 터지도록 춤을 배웠다. 나중에는 서울의 명월관, 국일관으로 진출할 정도로 장금도는 점점 유명해졌다. 장금도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인력거가 두 대씩 움직이고 그 돈으로 집을 두 채나 장만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금도라고 하여 위안부 징집을 피할 수는 없었다. 두 번까지는 연기를 해 줬지만 세 번부터는 안 된다고 했다. 서둘러 시집을 갔다. 바로 아들이 생겼고 그 길로 춤을 접었다. 당시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 뒤로 “춤꾼 장금도는 죽었다.” 몸에 박인 춤사위가 몸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할 때마다 소스라쳐 놀라며 세월을 다독여왔다. 혹여 권번 출신이라 손가락질 할까봐 사람들 많은 곳에는 가지도 않았고 다방 같은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속에 품은 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독한 세월도 몸 안에 깃든 춤을 죽이지는 못했다. 언젠가 딱 한 번 환갑잔치에 나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춤을 추지 않았는데 그때는 어떤 사연인지 거절할 수가 없었던가 보았다. 그런데 할머니 환갑잔치라고 그 집 손자가 학교를 가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그 녀석이 “야 느그 할머니가 우리 집 와서 춤추더라”며 손자를 놀리는 바람에 치고 박고 난리가 났다.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옛날에는 진짜 배고프고 천한 사람들만 이 짓을 했지. 지금에 와서야 예술이니 뭐니 해싸도…” 할머니의 웃는 낯이 쓸쓸하다. 이제 그 쌈박질하던 손자가 서른두 살이 됐으니 세월은 또 얼마나 흘렀는가. 권번 동창생들과 술 한 잔 나눌 수 있을 만큼 이제는 저쪽 세월로부터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만큼 자유로워지기까지는 수많은 망설임과 더듬거림이 있었다. 40년 간 장금도란 이름을 죽이고 살아왔는데도 ‘옛날 군산에 장금도라는 천하의 춤꾼이 있었다더라’는 소문은 죽지 않고 퍼져나갔다. 몇몇은 찾아와서 춤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그 할머니 죽고 없다고 해도 안 가고, 그 할머니는 죽고 나는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안 가고… 그래서 하는 수없이 다시 세상에 춤을 내보였다. “몇 십 년 만에 춤을 춰보는데, 아니 이 놈의 발을 들기는 했는데 어디로 디딜지를 몰라서 진땀께나 뺐지. 한 번 그러고 나니까 그 뒤로는 그냥 저냥 되더라고.” 그렇게 세상에 춤을 내놓고도 가족들한테만은 숨기고 싶었다. 그것은 장금도의 자존심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으로부터 춤을 춰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거 테레비에는 안 나오는 거지?” 수없이 다짐받고 춤을 추었건만 그것이 TV프로그램으로 방영되고 말았다. 며느리 친구가 그 장면을 보고 며느리에게 알려줌으로써 할머니의 비밀은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할머니는 공연이 있을 때마다 양로당 핑계를 댄다. 할머니의 무대 옷은 늘 세탁소에 걸려 있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양로당에서 놀러간다고 핑계를 대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그 길로 세탁소에 들러 무대 옷으로 갈아입고 공연장으로 간다. 집에 갈 때는 다시 세탁소에 들러서 옷을 맡기고 평상복으로 입고 집에 간다. 그렇게 할머니는 이 날까지 ‘도둑춤’을 추고 있다. “내 춤은 본시 싱거워. 그냥 몇 번 돌고 내려오면 끝나버리는 데 뭐. 춤이 하도 느리고 무거워서 젊은 사람은 답답증 날 것이여.” 할머니가 춤을 추는 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그저 몸에 배인 춤 흥을 한바탕 풀어놓고 싶어서다. 살풀이는 대개 길어야 15분이면 끝나는 ‘싱거운’ 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을 연륜과 흥과 한으로 채우는 것이 살풀이춤이다. 따로 양식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춤을 ‘마스터’한 춤꾼이 자기 흥에 겨워서 추는 춤. “이왕 툭불났응께(세상으로 불거졌으니) 인자 무대에도 설 수 있는 한 자주 설 계획인디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걱정이요.” 올 2월 국립극장에서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을 마친 후에 중풍으로 고생한 할머니는 걸을 때도 무릎이 까딱까딱 걸릴 만큼 좋지 않다. “언제고 연습은 없어, 그냥 한 번 하면 하는 거지.” 그만큼 할머니의 몸에는 춤사위가 배어있다는 얘기다. “아편쟁이 인 박이듯” 춤사위가 몸에 박였다는 장금도 할머니. 어떤 이는 장금도의 춤을 일컬어 “굳어버리지 않은 이 시대의 마지막 즉흥무”라고 말한다. 몸이 아프고 장단이 따라주지 못할 때는 “장금도가 춤을 추었을 뿐이지 ‘장금도의 춤’이 아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제 흥에 겨워 추는 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애초에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은 정해놓은 규칙도 순서도 없어서 제자를 기르기가 어렵다. 더러 춤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이들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내세울 만한 제자가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외워서 추는 춤이 아니라 음악이 나와야 비로소 춤이 딸려 나온다. 음악도 아니고 흥도 안 오르면 그냥 손가락 몇 번 젓다가 내려와 버리는 것이 장금도의 춤이다. “나는 춤출 때 장단 상관 안 해. 맘에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이지. 그런데 장단이 너무 느리면, 출 때는 모르겠는데 추고 나면 어깨가 무너지고 다리가 아파.” 그만큼 장금도의 춤은 예민하고 즉흥적이며 ‘지금 현재’의 춤이다. 아무리 좋아서 추는 춤이라지만 천하의 춤꾼 장금도가 ‘문화재 미지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장금도의 춤이 문화재로 지정된다 해도 그 전형성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민살풀이춤의 유일한 보유자인 장금도. 장금도의 춤은 ‘춤 이전의 춤’이요, ‘정형 이전의 풍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춤이다. 마당이 마련한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공연을 며칠 앞두고 할머니는 평온해 보였다. 이제 할머니에게 춤은 거창한 쇼도 아니고 숨기고 싶은 과거도 아니고 그저 생활 속의 일부일 뿐이다. 무릎만 괜찮으면 언제든지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는 장금도 할머니. 그러면서도 마지막 한 마디를 잊지 않는다. “춤이란 게 본인 만족이란 것은 없어. 객석에 손님 많이 들면 그것이 만족이지. 객석이 헤성헤성하면 차라리 걷고 말지, 춤출 맛이 안 나!” 아무리 제 흥에 겨워 추는 춤이라지만 보아주고 돋워주는 이가 없다면 그 또한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는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