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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 [문화시평]
즐거운 편지
이건용-군산대학교 미술학과 교수(2004-11-09 12:18:15)
"유년기의 두근거림으로 이끌다" ‘즐거운 벤치’라는 제하(題下)에 전주천 둔치(한벽루에서 싸전다리 사이)에서 8명의 젊은 작가들이 구혜경씨의 기획으로 야외 설치 미술전을 열었다. 사실 나로서는 전주천이 이렇게 맑아졌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는데 물고기들이 반짝이는 비늘로 지는 해를 생동감 있게 그 나름대로 반사시켜 작은 물고기들도 함께 재롱을 떠는 시냇가가 되어 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억새풀까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이름 모를 풀섶 사이로 드문드문 자리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접하면서 이런 미술적 접근은 필요한 것이라고 새삼 느낌을 더했다. 사실 우리네 삶이란 모든 것들이 공식적인 일상이거나 예상된 범주 안에서 돌아간다. 음악회나 전시 그리고 기획 이벤트조차 예상된 회로 속에서 짜증스럽게 운영되다보니 모든 것이 그럴 것이라는 가정의 범주 안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은 예외적인 모험을 위해서 탈출 할 수 없다. 예술에서 조차 예외적 모험을 기획자나 작가는 두려워한다. 그러기에 기존의 안전한 문화지대에 안주하여 문화행위 안에서 서로가 의미있는 도전적 질문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작가 자신도 발언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문화행위 안에서 예외의 지점에 한 발자국도 내밀기를 거부하는 습관으로 볼 때는, 돌다리를 건너서 모여든 평범한 할아버지들이 작가 정하영에게 던진 계속적인 질문들 때문에, 작가가 지쳐있는 듯한 진풍경을 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재미있어 보였다. 김성호는 냇가가아니라 냇 속에 돌들을 찾아내서 49라는 숫자를 몇 시간 계속 만들고 있었기에 물속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관객들의 질문은 피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그가 흐르는 수면(水面)아래 돌을 이용해 만든 49라는 숫자는 죽음에서 환생(?)까지 티벳인들의 49일간 유예시간의 공백을 물(水)의 흐름과 돌이 만든 숫자 사이의 장(場)에서 공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돌들과 물의 49제(祭)는 그의 행위와 그 글자를 바라보는 그 누구에게도 설사 물의 흐름이 다른 글자를 만들거나 뭉개어 버린다 해도 우리의 상상과 의미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소유뿐이다. 우리가 한때는 전주천을 냄새나는 오염 개천으로 만들 수 있거나 물고기들과 개구쟁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맑은 물로 만들 수 있듯이 한평생이 내세를 위한 유예기간일지 모른다는 명상 속에 ‘49’자가 물소리와 함께 어둠속으로 하루가 사라짐을 보았다. 정하영의 작업은 현란한 합성수지 포장으로 개울속의 돌들을 포장하거나 냇가 정자의 지붕까지 연결하는 작품으로, 돌다리를 건너뛰는 사람의 눈에 물속 깊숙이 현란한 색깔을 발하는 포장된 돌들을 보면서 따라가다 보면 거기 정자가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런 이동의 관심은 채성태의 경우 더욱 치열해지고 구체화되어, 서로 나눌 수 있는 볍씨와 그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작은 봉투와 근처의 다른 식물의 꽃씨들마저 배려하는 핑크색 리본으로 길잡이를 하는 풀 섶길이 있다. 우리는 호기심으로 작은 두개의 독 뚜껑을 열면서 비로써 서로에게 나눔의 행위에 참여하는 즐거움이 어린아이 같은 열린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설치물의 성격상 또는 구조상 김향권과 김금희의 숨바꼭질과 오세나의 휴식을 위한 안경은 인간 신체의 일부이거나 안경테의 형태로서 그것이 환경 속에 어떤 명시적 권력을 갖을 필요를 필연적으로 느끼는 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호학적 캐릭터성과 매체적 완결성만을 갖출 수 있었으면 얼마나 즐거운 만남을 주었을까 생각하였다. 일단은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의 셋트 장치가 무너질 것 같다든가 안경테의 우울한 색채이기보다 즐거운 색채와 확실하게 숨겨진 장치로서 그들의 아이디어가 크기에 비해서, 매체 자체의 장치가 너무 허술하기에 작품으로서의 논외의 한계에 머무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유기종의 경우도 해당되는 경우다. 그의 컨셉이 알만도 하고 이해의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일단은 전시에 참여한 이상 작가의 아이디어를 드러내는데 있어서는 작가의 기본적인 작업은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작가정신에 답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가령 박은주의 <넌 지금도 꿈을 갖고 있니?>는 투명 포장용 캡슐을 재활용한 것인데 그 기본 크기와 단위가 매우 작은 것이지만 그냥 밋밋한 현상이기 보다는 그의 손톱의 때나 콧구멍(?)에서 그의 코딱지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개인적이고 열려진 발견의 즐거움을 안겨 준다. 그가 보여주는 꿈은 아주 작은 소망에서 세상의 걸러지는 망 속으로부터 떨어진 것 중에 사금덩이를 줍듯이 오랜 잃어버린 우리 자신의 유사(類似) 유년기의 두근거림으로 이끈다. 왜 우리는 그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의 장치에 깊숙이 개입된 공범자가 되는지 자문하게 된다. 멀리서 바라보다 보면 이름 모를 열매 같은 것이 가까이 다가서면 돋보기를 들여대듯이 우리를 이끌어 감은 심성희의 작은 축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의 흙으로 빚은 황토 빛 테라코타의 작은 인물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소인국에 찾아온 느낌이 들게 한다. 그냥 아이들이 놀다가 가버린 흔적 같기도 하고 또 구태여 그 의미를 되새겨 참여해 보면 현재의 삶이라기보다는 오래 전에 사라져 추체험(追?驗)된 가상의 현실이 일렁인다. 그가 앞으로 더 어떻게 연출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더 많은 인류학적 지식과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단순히 설치 미술이 그렇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상식적인 장르라는 인식보다는 현재의 장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 하는 점과 그 이해(해석)의 견해 뒤에 숨어있는 다른 분야(타 분야 또는 다른 학문) 와의 학제적 관계에 놓여진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를 느낀다. 설치예술은 오늘날 그리 녹록한 분야가 아니다. 김성호가 단순한 숫자, 49라는 하나의 숫자를 돌을 놓아 수면을 유지하며 설치하기 위해서 장시간을 물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49제에 대한 긴 호흡의 종교적 관념의 학제 간 긴밀성이 드리워져있고, 그가 어린시절 보았던 시냇물이 오늘도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그가 그 일을 위해서 49공탄(孔炭)을 무수히 쌓아 놓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건용 |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현재는 군산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서양화’와 ‘설치미술’·‘행위미술’·‘현대드로잉’을 연구하고 있다. 미디어씨티서울전, 국제싸이언스 아트 페스티벌 등 수많은 전시에 참여했으며, 지난 2002년에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초대기획 이건용 미술 35년 전이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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