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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 [문화저널]
'은행나무길'
한정화 시인(2004-11-09 11:52:18)
나를 버리러가는 '은행나무 길' 부수고 녹이고 삭이지 못한 마음의 찌꺼기들이 쌓이고 쌓였다가, 똘똘 뭉쳐졌다가 폭탄처럼 꽝 터질 때가 있다. 터지면 터지는 마음만 폭삭 무너지는 게 아니라 재수 없이 옆에 있던 마음에까지 파편이 튀어 아프게 되는. 다행히 터지려는 조짐을 마음이 먼저 알아차리는데, 그러면 얼른 폭탄을 꺼내 던질 안전한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바다로 간다. 시외버스를 타고 격포나 기차를 타고 여수의 오동도로. 꾹꾹 누르며 참으며 데려간 그 몹쓸 덩어리를 풍덩 던져 놓고 바다가 대신 꽝꽝 터지는 소리를 듣고 온다. 이까짓 것 못 다스려 여기까지 갖고 왔냐고 꾸짖는 소리와 함께. 허나 그게 꼭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터지기만 하던가. 바다는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기만 하던가. 대책없이 폭삭폭삭 마음 무너지지 않으려면 평소에 부지런히 조금씩 덜어 내놓을 장소가 필요하다. 그럴 땐 신발만 신으면 된다. 문만 열면 된다. 동네 한 바퀴면 된다. 나의 동네 한 바퀴는, 우선 아파트 후문에서 바로 왼쪽으로 빠지는 오래된 길이다. 지붕 낮은 집들이 아직도 따닥따닥 붙어 있는 골목길. 초입부터 닭똥 냄새가 풀풀 나는 길. 슬리퍼 끄는 소리, 수돗물 소리들이 대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길. 해마다 여름이면 봉숭아 꽃잎을 한 움큼 훔쳐와 손톱에 꽃물 들이는 길. 그 골목의 명소는 단연 동사무소 옆집이다. 늦가을, 담장 안 은행나무에서 와르르 쏟아진 은행잎이 그 집 기와지붕과 담장 밖 좁다란 길을 노랗게 뒤덮은 풍경, 그리고 그 자리에 눈이 내리고 쌓이는 풍경……. 한 달에 한 번 공과금 내러 가는 길도 있다. 국민은행 효자동지점 가는 길. 완산소방서, 풍남중학교, 효문초등학교, 상산고등학교가 있는 길. 사진관과 치과와 문구점, 서점, 옷가게와 분식집 들이 있는 길. 가끔 멈춰 김밥이나 라면, 떡볶이를 먹는 길. 3월말 공과금 내러 가는 날은 자꾸만 고개가 치켜올려진다. 그 길에 목련나무가 있으므로. 목련꽃이 필 무렵이므로. 가장 빈번히 찾는 길은 큰길 건너 삼익수영장 가는 길이다. 많기도 많은 밥집들과 술집들을 지나며 언제 한번 와야지, 입맛을 다시다 보면 삼천도서관이 나온다. 도서관 옆 작은 공원. 그쯤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앉기도 한다. 노는 아이들과 노는 엄마들과 노는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본다. 그 중 누군가는 또 그렇게 노는 나를 볼 것이다. 조금만 더 걸으면 수영장이다. 저물 무렵이면 장이 서는 길. 주말과 휴일엔 싼 옷들 신발들 장난감들 책들 온갖 잡화들이 쫙 깔리는 길. 며칠 전 거기서 파 서너 단을 떨이로 사다 김치를 담갔다. 맛있게 익었다. 곰삭지 못한 내 마음의 파편 때문에 아팠던 사람,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 사람들이 와서 먹었으면 좋겠다. 가을이다. 성질 급한 몇몇 잎들은 이미 붉다. 우리동네 단풍은 싱싱수퍼 가는 길, 놀이터 앞이 제일이지만 어디 또 징그럽게 이쁜 단풍 없는지 찾아보며 마음 좀 탈탈 더 털어야겠다. 한정화 | 196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2년에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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