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 | [문화저널]
'원오곡 마을 논두렁길'
김중규-향토사학자(2004-11-09 11:51:14)
탯줄보다 얇던'원오곡마을 논두렁길'
초등학교 때 처음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이태리영화 ‘길’을 보며 어린 나이였기에 더욱 낯설었던 떠돌이 광대 잠빠노(안소니퀸)의 어눌한 연기와 착한 백치여인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의 남루하고 따스한 정감이 파국으로 끝나는 걸 본 후 어린 마음… 울컥… 이후 길이라는 단어는 청소년시절 짝사랑 이성을 기다리던 골목 모퉁이의 안타까움을 간직 한 채 나의 뇌리에 인생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로 각인되어 있다.
인생의 비극과 묘미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 때문이듯 오솔길로 이어진 고개 너머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대감의 신비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길이라는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것이리라. 오래지 않은 길을 걸어오며 나만의 의미를 간직한 길을,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길을 생각해보니 갯벌에 붉은 칠면초 넓게 펼쳐진 만경강 하구의 제방과 대동여지도 속에 그려진 옛 길을 뒤져 가던 중 만난 잊혀진 산길, 금강의 포구와 나루를 찾아 걷던 중 만난 충남 칠은리 포구길 등 많은 길이 떠오르는데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길을 꼽는다면 군산의 만경강변에 자리한 원오곡 마을의 논두렁길을 들 수 있다.
그 길을 처음 걸었던 것은 겨울이 깊어가던 1997년이었다. 작은 사업과 지방사 공부를 병행하며 동분서주하던 나는 가끔 아내와 함께 인근의 시골길을 찾는 것으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하곤 하였다. 그날은 잿빛 하늘이 손에 닿을 듯 낮게 가라앉아 뒤돌아서면 눈이 내릴 듯한 날씨였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살박이 큰아이와 둘째를 가져 만삭인 아내와 함께 찾은 원오곡 마을은 옥구읍 선제리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직진하면 나오는 수산리 삼거리 우측에 자리한 마을이다. 원오곡이란 명칭은 오리실에서 유래했다 하는데 옛 옥구현 읍내 마을에서 이 마을까지 오리(五里)가 되기에 그렇게 불렀고 한다.
원오곡 마을은 천석군과 만석군이 끊이지 않는 부자 동네로 옥구현에서는 읍내 다음가는 부자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군산에서는 보기 드문 큰 기와집들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4시경 도착하여 기와집들을 둘러보던 중 넓지 않은 논배미를 사이에 두고 기와집과 마주 쳐다보며 자리한 초가 한 채와 그곳에 이르는 논길을 볼 수 있었다.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겠지만 눈에 안 들어왔던 초가는 어스름 겨울 날씨에 군불을 태우는 연기 탓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는데 아내와 나는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을 못 이기고 축축하여 미끄러운 논두렁길를 걷게 되었다. 초가에 이르는 길은 좁은 논두렁길뿐이었는데 그처럼 짧은 논길이 기와와 초가를 가르고, 지배와 예속을 너무도 당연하게 구분 지음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싶게 그 길은 익은 벼들이 자리를 비워 넓어진 논에 길게 몸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길의 끝은 초가집 싸리 울타리에 닿고 초가집에는 당시 아흔은 됨직한 꼬부랑 할머니와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은 순한 흰둥이 개가 살고 있었다.
갑작스런 손님의 방문에도 그간의 외로움 탓인지 반가이 맞아주신 할머니는 우리 가족을 두 평이 안돼 보이는 방안으로 들이셨는데 군불을 많이 지핀 탓인지 엉덩이를 옮겨가며 앉아있어야 했던 방에서 할머니가 큰아이에게 주시는 선비과자를 우리 부부가 더 많이 먹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는 이젠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의 아들이 이웃마을에 살며 오라 하는데 집 뒤 동산에 할아버지가 먼저 가서 기다리기에 뜰 수 없다며 웃으시던 할머니의 웃음과 날 풀리면 다시 오라며 아쉬워하시는 눈길을 뒤로 하고 기어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되돌아 나오던 논길의 기억은 눈앞에 생생하다. 에어콘이 없는 차였기에 겨울 나들이가 그나마 가장의 체면을 세 울 수 있던 시간 속에 만난 그 길은 양반마을 오리실 안에 존재하던 서로 전혀 다른 두 세상을 이어주던 탯줄보다 얇은 논두렁길이었다.
김중규 | 1966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위원, 한국교통사연구소 연구위원, 군산향토문화연구회부회장 등 활발한 지역사 연구 활동을 펼쳤다. 현재는 군산시청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군산사랑』공저, 『증보판 군산사랑』공저, 『잊혀진 백제 사라진 강』, 『군산역사이야기』, 『군산답사여행의 길잡이』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