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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 [문화저널]
'일주문 너머 도솔암가는길'
이재석 시인(2004-11-09 11:49:50)
상사화 물결 슬픈 '일주문 너머 도솔암가는길' 언제라도 나는 선운사의 넉넉한 품이 좋다. 그 인근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낸 나로서는 외지인들이 관광지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그저 큰집 작은집을 드나드는 것 같은 마음으로 이곳을 찾곤 했던 것이다. 마음이 고픈 날, 술과 벗이 고프고, 시와 문학 또한 고픈 날이면 나는 그 온갖 기갈을 이 선운사 인근의 길목어름에 와서 여하간의 방식으로 해소시키는 것이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일주문 너머 도솔암에 닿는 산책길 위에는 산억새의 여린 줄기나 꾸린듯한 풀피리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 그랬다. 분명 지금보다 더 젊었던 날과 구분 되어지는 이 '소리'의 느낌은, 아마도 그 사이에 내 앞으로 다가온 세월의 두께이거나 제법 두터워 지기도 했을 무게감 때문이기도 하리라. 어디선가 내 무명의 입술부빔과도 닮은 이 마른 기척은 이렇게도 실감인양 감지되어 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오늘은 오가는 세월 위로 스쳐가는 이 서늘한 감상 또한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내가 아닌 많은 사람들도 지금 이 길을 걷는다. 어디선가 또 제날들의 길을 출발하여, 이윽고 이 길 위에 도착했을 사람들… 그리고 이내 우리가 함께 닿아 보려는 길의 저 끝에는 마침내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젊은 날 한때.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삶의 깊은 좌절을 경험한 기억이 있었던 나에게 '선운사’ 도처에 널린 많은 길목어름들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큰절의 일주문을 등 뒤에 두고 암자로 가는 오솔길은 내 상한 가슴에 더할 나위 없는 위무의 공간이고는 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의 말미에서 비롯된 이 길의 감탄사는 누가 뭐래도 상사화의 물결이었다. 슬픔처럼 붉디붉은 화관을 쓰고, 잎이라곤 없는 껑중한 꽃대 위에서 물결처럼 펄럭이며 천지간을 이루기도 했던 은성한 꽃의 시간들… 어디선가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 앞으로 다투어 몰려와 자신들의 추억이며 빛나는 시간들을 가슴에 새겼다. 시를 쓰는 나의 버릇도 그 앞에서 오랜만에 그럴듯한 한 구절을 얻었으니, 그렇게 누구에겐들 자신의 마음에 간직한 길목 하나쯤이 없으련만, 이미 내 몸에 육화 돼버린 '도솔암 가는 길'은 슬며시 이렇게 망외의 소득을 안겨 주기도 한 셈이다. 나는 또 그렇게 그 길 위에 나서 귓전으로 찾아드는 산억새의 풀피리 소리 한 소절에 상한 가슴을 씻으리. 바람이 내게 전하는 말 있어/ 하던 일 잠시 멈추고/ 귀대어 보니// 글쎄/ 누가 나를 보고 싶데요// 누구시길래/ 한참을 그렇게 되물어 봐도/ 그 한마디 남겨 놓고 사라져 버리지 않았겠어요// 몇 날이 흐르고/ 하루는 외진 숲속길을 따라/ 흔들리는 손 둘데 없어/ 뒷짐 지고 걷는데// 글쎄/ 얼마전 그 바람이 다시 왔네요// 어깨를 살짝 스치며/ 은근히 전해 주는 말/ 저기 저기 저… 졸시 「상사화」 전문 이재석 | 1961년에 고창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건대학 졸업을 졸업하고 현재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는 『젊은 날의 슬픈 연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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