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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 [문화저널]
'갓바위 오르는 길'
유종국-전북과학대학교수(2004-11-09 11:44:41)
낡아서 소중한 '갓바위 오르는 길' 코스모스의 삶의 자리는 아마도 길가인가 보다. 들판이나 산중에 살기엔 어색하다. 그는 정히 길가에 피어있어야 제격이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꽃은 다 지고 만다. 개중에 10월말쯤에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지각생이 있다. 대개 못난이 코스모스다. 그는 보통 그것보다 키가 작고 몸피가 더 가냘프다. 갓바위(笠岩)에 오르기 위해 정읍시 입암면(笠岩面) 상부 마을길을 돌아 가다보면 뒤늦게 핀 못난이 코스모스를 만난다. 눈치 빠르지 못한 이 지각생은 꽃봉오리가 작지만 그 자줏빛은 아주 진하고 참 곱다. 어쩌면 고와서 서럽기도 하다. 꽃은 지각생이 더욱 곱기도 하지만 늦게 피기에 더욱 정이 간다. 갓바위(笠岩山)는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과 백양산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626m의 조금은 나지막한 산이다. 그들로 인하여 입암산은 어디에도 자신 있게 스스로의 이름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 산이다. 내장산 I.C에서 우측으로 300m쯤 가면 입암면 상부 마을에 새생명교회 건물을 끼고 좌회전하여 걸어 올라가다 보면 좁은 길가에 못난이 코스모스 몇 그루를 만난다. 일견 너무나 고와서 서러운 그 진자주색 이파리를 볼 수 있다. 그 길은 수레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다. 길 곁에 감나무 밭의 감은 짙은 오랜지색이다. 대부분 어른 주먹만한 대봉시라는 감이다. 보기만 해도 풍성하여 배부르고, 여유 있어서 느긋해진다. 이것이 가을날의 풍요로움이다. 감나무 숲을 지나면 지름 100m 정도의 작은 연못에 이른다.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무렵이면 갓바위가 연못 속에 비친다. 연못에 비친 바위의 모양이 바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차양 넓은 갓 모양이다. 그래서 갓바위라 불렀다. 멀리서 입암산을 바라보아도 역시 그런 모습이다. 어떤 이는 멀리서 보면 여인의 젖가슴과 젖꼭지 같다고 말한다. 장성 갈재 쪽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입암산 등산길은 다소 가파르고 거칠다. 산길이 야생마 같다. 산길이 톡톡 쏘아대는 처녀 같다. 거친 바윗돌을 밟고 간혹 미끄러지면서 이마 위의 땀을 연신 닦아 내리며 숨을 헉헉거리며 올라간다. 정상은 갓의 상단이다. 말하자면 젖의 꼭지이다. 산꼭대기에서 서해 바람을 느끼며 수건으로 땀을 훔치노라면 곰소 앞바다가 희미하게 보이지만 몹시 가깝게 있음을 느낀다. 갓바위는 옛 입암산성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갓바위 옆으로 빙둘러서 산능성이에 온통 큼직한 돌이 쌓여 있다. 돌로 축조된 산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갓바위는 산성(山城) 북문(北門)이다. 산성(山城)의 남문(南門)은 장성군 남창골이다. 갓바위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산성의 안쪽이다. 산성 안쪽은 언필칭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이곳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전답(田畓)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운데로는 시냇물이 흐른다. 억새풀 숲이 10여 리에 펼쳐져 있다. 억새 풀꽃이 온통 산을 뒤덮은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마치 초겨울 온산에 눈이 내려 산이 온통 하얗게 되어 버린 듯하다. 봄이면 진달래꽃, 복숭아꽃 등 각종 꽃들의 향연 속에 흥취도 술맛도 아니 좋을 수 없다. 무릉도원, 이것은 봄이든 가을이든 계절과 관계없이 여기서는 언제나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정극인 선생이 답청하면서 마신 태인 국화주가 그 품격에 딱 어울린다. 허물어진 집, 깨진 항아리, 확독 등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세속과 절연(絶緣)한 이곳에 지금으로부터 1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구학문(舊學問)하던 사람들이 상투 틀고 머리 땋아 내리며 살았다. 그들은 뒤늦게 새로운 학문과 질서를 받아들였는지 하산(下山)하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눈치 빠르고 아주 잽싸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늘날 현실에서 지각생이 된 구학문자(舊學問者), 그들이 참으로 아름답다. 지각생이지만 약삭빠르지 않아서 아름답다. 마치 눈치 빠르지 못해서 늦게 핀 코스모스 꽃처럼. 그들이 살면서 현대의 세속과 멀리한 곳, 그래서 갓바위는 더욱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라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면 더욱 좋은 곳이다. 유종국 |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전북과학대학 복지계열 학과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몽유록소설연구』, 『고시가양식론』, 『대학과 문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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