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 | [문화저널]
'대운이재고갯길'
신정일(2004-11-09 11:43:41)
어둠 속에별빛 동무삼아 넘었던 '대운이재고갯길'
지난봄 오랜만에 고향인 백운에 갔다. 원촌에서 어린시절 몇 년을 보낸 나에게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나에게 임실 17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섬광처럼 눈에 띄었고 그 순간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던 한 시절이, 대운이재를 넘어 임실로 걸어갔던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가장 먼 길을 걸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였을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때의 나에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그들의 까만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했다.
그 무렵 우리집안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말이 아니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옷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옷가지를 팔고 받아온 쌀, 콩, 보리 , 서숙이라 부르는 조등을 백운에서 임실까지 예닐곱 말씩 이고 가서는 팔고는 했다. 그 이유는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백운 소재지인 원촌에서 임실읍 까지 17킬로미터를 몇 번이고 오고 갔던 것이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곡식 너댓 말을 무겁게 등에다 지고 사십리가 넘는 길을 간다. 어쩔 도리가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때 어머니와 절충했던 것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아침 일찍 깨워 달라”고 잠이 들었지만 아침 일찍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대로 오기나 하는가. 이리 저리 보채는 나에게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단다.” 그래 무심한 새벽닭은 ‘어서 일어나라’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도 못들은 척 하고 누어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 가만히 문을 열고 나 서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무리들, 주섬주섬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 둥 만둥 하고 너 말 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했다. 유난히 작았던 열 서너 살짜리 소년이 너댓 말 쯤의 곡식을 등에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어둔 밤길을 걷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동창 마을과 오정마을을 지나면 대운이재에 닿는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 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 마을 사이에 자리잡은 대운이재고개는 이리저리로 구부러지고 나보다 두세 말을 더되게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쁘다.
<한국지명총람>에“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 마을에서는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서 개들이 울어 쌓는다. 수철리를 지나면 곧 성수리에 닿는다. 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 때 쯤이면 내 또래의 아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나는 부끄러워 어머니 뒤에 바짝 붙어 장을 가고 있으니, 임실 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사십 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어온 나의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서 또 돌아갈 시간을 기다린다. 그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은 얼마나 찬연한 슬픔으로 나를 아프게 했던가? 그 길을 지나가며 문득 그 시절 걸었던 길이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떠오르니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는 말이 맞는다는 말인가?
신정일 | 1985년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평가받고 있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묻혀 있는 지역 문화를 발굴하고 재조명하기 이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치고 있다. 현재 황토현문화연구소장과 전라세시풍속보존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 『모악삭』(공저), 『지워진 이름 정여립』, 『나를 찾아가는 하루산행 1·2』, 『금강 401km』, 『섬진강 따라 걷기』,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