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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 | [문화저널]
나를 키운 '길세개'
김용택 시인(2004-11-09 11:42:00)
나를 키운 '길세개' 나에게는 세 개의 길이 있다. 한 개의 길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일찍 사라진 것들은 늘 아쉽고 안타깝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찍 사라진 것들은 자기를 지킬 힘이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찍 사라진 길이라고 해서 내 속에서 아주 지워진 길은 아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아름다운 길은 강변으로 난 길이었다. 그 길을 나는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20년을 걸어 다녔다. 그 길에서 나는 오랜 세월을 살았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자연과 농부들과 시와 예술을 배웠다. 나는 길을 걸으며 오래오래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들을 집이나 학교에 가서 정리했다. 아니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길에 대한 기억을 떠 올려 그 길에 대해 글을 썼다. 오랜 기억의 저 편,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 길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늘 푸른 물이 발아래 출렁였고, 그 호수에는 고기들이 뛰놀았다. 겨울이면 그 호수에 얼음이 하얗게 얼어 우리들은 그 얼음 위를 걸어 다녔다. 그 길에는 또 징검다리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호수가 사라지면서 그 징검다리도 사라졌다. 또 다른 징검다리 하나는 몇 해 전에 사라졌다. 징검다리는 물이 불면 넘쳤고, 나는 신과 양말을 벗고 그 징검다리를 건넜다. 서리 친 늦가을 시린 물을 건너가 빨간 발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양말을 신기전까지 바위 위에서 발을 말리고, 양말을 싣는 그 시간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 길에 꽃이 피고, 비가 오고, 꽃이 지고 눈이 내렸다. 해 가 뜬 아침 해와 지는 해가 달랐으며, 흐르는 물과 물소리 또한 아침과 저녁이 달랐다. 나는 걸으며 생각한 것을 풀밭에 앉아 쓰기도 했다. 그게 시가 되었다. 내 시는 그렇게 강가에서 강물을 따라 흐르며 쓰여졌고, 풀 섶에서 우는 풀벌레들처럼 그렇게 풀 섶에서 태어났다. 나무와 나무, 산과 산, 바위와 바위, 논과 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길을 나는 그렇게 걸었다. 그 길은 내 눈에서 사라지고 내 마음에만 지금 남아 있다. 나는 그 길을 지금도 걷는다. 또 하나의 길은 지금도 남아있다. 우리 동네에서 이웃마을로 가는 그래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들 가에 있다 나의 시 '그 여자 네 집'이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 길 어디 메 쯤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뜨거운 여름 집에 가다가 나는 그 나무 뿌리에 기대앉아 땀을 식혔다. 그 나무뿌리는 서늘했다. 눈보라가 치면 나는 그 나무 등 뒤에 서서 눈보라를 피했고, 달이 뜬 밤이면 나는 내 그림자를 나무 그늘에 숨기고 '그 여자'를 기다렸다. 그 나무 아래 피어나는 물 싸리 꽃이며, 찔레꽃이며, 철철이 피어나는 많은 풀꽃들을 보며 그 나무에 대한 시를 10편쯤 썼다. 또 하나의 길이 내겐 있다. 그 길은 지금도 있다. 내가 2년 동안 걸어 다닌 길이다. 내가 걷고 멈춘 그 길 한쪽 끝에는 우리 집이 있었고, 한쪽 끝에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가 있었다. 그 길은 지금도 전봇대가 없고, 포장이 안 된 길이다. 십리가 되는 그 길은 강물을 따라 난 길이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 길은 꽃길이다. 산과 산 사이 강물로 내리는 비와 눈을 나는 너무나 좋아했다. 혼자 걸었으므로 그 눈과 비는 모두 내 것이었다. 아니, 내가 눈이 될 수 있고, 비도 내가 되었다. 우린 하나였다. 하나였음으로 우린 편이 없어서 행복했고, 평화로웠으며 사랑으로 가슴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 길에서 나는 두 권의 산문 집을 썼다. 길에 깔린 자갈들을 밟으며 나를 마중 나오던 아내의 발소리가 들리던 그 길은 우리 동네에서 천담까지 가는 십리 강 길이다. 지금 그 길에, 그 산에, 그 강에 오색 단풍이 불탄다. 그 길은 자기 발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사람의 길이다. 김용택 | 46년 임실에서 태어났다. 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섬진강』, 『밝은날』,『누이야 날이 저문다』, 『그대 거침없는 사랑』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등이 있다. 86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임실 덕치국민학교의 교사로 섬진강의 시인으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우뚝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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