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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 [문화칼럼]
울음 한 사발과 웃음 한 자락
강영희(문화평론가) (2004-10-18 14:43:03)
당신의 말씀을 들어보고 싶네요.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이 될까요? 그걸 어떻게 말로 하냐구요? 과연 그렇기도 해요. 아름다움이란 게 본시 그런 거지만 특히 한국적인 아름다움에는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란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거칠게 잡아채서 말의 그물에 담아보면 그건 ‘상(象)의 아름다움’ 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과연 ‘상(象)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문득 세상이 달리 보이기도 하거든요. 인상이 좋다고 하면 반드시 ‘잘 생긴’ 얼굴만을 말하는 게 아닌 것처럼, 상(象)이란 형(形)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기 때문이죠. 한국인은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메만지는 기교(技巧) 대신 크게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격(格)을 추구했고, 이에 따라 한국적인 멋에는 진선미(眞善美) 전반을 포괄하는 정신적인 가치가 들어앉아 있어요. 상생적인 조화에 따른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한국인 ‘상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조화와 균형을 통해 생겨나는데요, 한국인은 이런 조화와 균형을 상생(相生)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상생의 반대편에는 상극(相剋)이란 게 있죠. 이에 따라 한국인은 ‘상극적인 것’을 가능한 한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썼고, 그런 노력은 참으로 지극한 것이었어요. 한국문화의 실천원리는 이처럼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었는데요, 김치나 장류를 담아 삭혀내는 발효의 원리도 그런 거였구요, 장승을 세우거나 나무를 심는 식으로 편안치 않은 곳을 달래서 편안한 곳으로 만드는 비보(裨補)의 원리도 그런 거였어요. 이처럼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의 테두리 안으로 수렴시키고, 인간적인 상극을 우주적인 상생으로 승화시킨다는 생각은, 결국 천지인(天地人)이 하나라는 사상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한 한국인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인이 상생적인 조화에 따른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을, 처음부터 상극적인 것을 회피한 것으로, 그러니까 형(形)의 차원에 대해 애당초 무관심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한국의 미를 ‘무작위의 미’나 ‘무기교의 미’처럼 자연 자체와 다를 바 없는 ‘무의식의 미’로 해석하는 흔히 마주치는 생각 속에도 이런 잘못이 포함되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형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형의 거칠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거죠.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형의 거칠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의 유화를 떠올려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어요. 박수근의 유화는 마치 화강암의 마애불이 환생한 듯한 거칠은 질감을 추구하여 한국적인 마티에르(matiere, 재질감)의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거든요. 하지만 다시 한번 돌아보면 이같은 질감에 대한 관심은 비단 박수근의 그림에서뿐 아니라 한국문화의 전반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실천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문화에서 형의 거칠음이란 소극적인 무의식의 결과가 아니라 적극적인 미의식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종이만을 봐도 중국이나 일본의 종이와는 달리 한국의 종이에는 수천수만의 잔주름이 여울진 할머니의 손등처럼 거칠거칠한 결이 있구요, 여염집의 문짝이든 궁궐의 문짝이든 간에 불퉁스런 옹이가 그대로 박힌 자국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잖아요? 한옥의 얼굴마담이라고 할 수 있는 대들보 가운데는 울퉁하니 휘어진 대들보가 적지 않구요, 예술 작품의 재료로 쓰인 돌을 봐도 중국이나 일본의 돌과는 달리 거칠은 화강암의 재질감을 별다른 가공 없이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요. 조형적인 면을 봐도 심지어는 궁궐의 경우조차 좌우가 가지런히 대칭이 된 집을 짓기보다는 흥부네 집처럼 식구가 한 사람 늘어날 때마다 한 칸씩 늘려지은 듯한 비대칭의 형태를 취하고 있구요, 도자기의 경우에도 살짝 일그러진 달항아리처럼 슬쩍 엇 맞춘 듯한 파격(破格)의 형태가 던져주는 생동감을 좋아하죠. 한국적인 마띠에르 또는 형의 거칠음에 대하여 한국적인 재질감 또는 마띠에르. 삶의 거칠음 속에 역설적으로 생기 넘치는 우아함이 깃들 수 있다는 것, 졸(拙)함으로써만 아(雅)해질 수 있다는 것. 낮은 곳으로 내려서야만 높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것. 신산(辛酸)함에 가슴이 짠해지는 장바닥의 복판에 버티고 설 때에만 사람살이의 진리를 벼락처럼 깨우칠 수 있다는 것. 울음 한 사발쯤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때에만 누군가에게 웃음 한 자락쯤을 던져줄 수도 있으리라는 것.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형의 거칠음’ 속에 ‘상의 아름다움’을 담아낸다는 것. 이건 비단 미(美)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관 전반의 문제, 나아가 오늘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비전의 핵심까지도 포함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당신의 말씀을 들어보고 싶어요. 강영희 /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금빛 기쁨의 기억』과『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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