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4.9 | [서평]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김은혜 / 197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2004-09-14 07:29:51)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 김경미, 조혜란 저, 돌베개, 2004.7. 김은혜 / 여성다시읽기 회원 유난히 뜨거웠던 올 여름, 한국 여성들이 안방문을 열어젖히고 달빛 아래로 모여드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8월 13일, 이른바 ‘달빛시위’는 언론의 보도태도 개선과 남학생 성폭력 예방 교육, 정부의 치안대책 마련 등을 외치며 약 2시간동안 진행됐다. 무려 21명을 살해한 흉악범의 ‘부자도 싫고 여자도 싫었다.’는 음성이 공중파 방송을 타고 안방으로 울려 퍼진 지 한 달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인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노린 이 시대 남성살인마에 대한 우리 사회의 치안 대책은 어처구니없게도 여성에게 “노출이 심한 옷을 피하고 늦게 귀가하지 말 것”이라는 충고가 전부였다. 안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여성들은 다시, 안방으로 숨죽여있으라는 우리사회의 무책임한 논리에 반기를 든 21세기 한국 여성은 그래서 이 ‘달빛 시위’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아름답고 유쾌한 퍼포먼스와 구호는 공중파를 타고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지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조신하게 행동하라’는 무시무시한 흉악범의 음성과 그의 잔혹한 살인행각이 시시각각 상세히 전달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태도였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건대 ‘밤길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어느 시위 참가자의 말처럼,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들의 거대담론에 치여 항상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여성 개개인은 성욕도 없고 사회적 욕망도 없는 식물인간으로 길러져왔고, ‘현모양처’, ‘열녀’라는 이름으로 박제당해 왔다. 그러나 달나라 화성이 원격조종 로봇으로 본격적인 탐사에 들어갔다는 21세기, 역사에서 제외되었던 여성사도 이제, 미시사와 생활사 지역학 등과 더불어 다양한 각도로 조명되기 시작한다. 가부장적 시각에 갇혔던 조선의 여성들을 재해석한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은 바로 이 탐사 과정 중 발굴해낸 결과물이다. 이 책은 사회적 억압기제가 충만한 조선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도 주체적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언니’들의 ‘비범한 삶’을 문학적 사료를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박무영, 김경미, 조혜란이라는 고전문학 여성 비평가들은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을 필두로 삼종지의를 따른 정경부인 송덕봉,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 뛰어난 재기로 소박맞은 이옥봉, 이 시대 남성의 불온한 기획에 의해 다시 신현모양처 굴레로 덧씌워진 『선택』의 주인공 안동 장씨 등 열 네 명의 ‘이름난’ 조선 여인들 앞에 붙여진 고착화된 수식어를 떼어내고자 한다. 그래서 이 세 명의 작가들은 가부장적 수식아래 갇혔던 그녀들의 일상과 삶, 그리고 예술적 업적 등을 재서술한다. 신사임당의 이름 앞에, ‘그녀를 그녀로 존재하게 하라’라고 외치는 작가는 이제 그녀를 ‘섬세하고 여린’ 존재로 묘사하며 신사임당의 모계혈통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제가 죽은 뒤에도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 라는 신사임당의 당찬 목소리를 실어줌으로써 지금까지 기획된 현처, 목소리 없는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게 한다. 삼종지의의 모범 사례였던 송덕봉은 ‘나는 며느리로서 할 만큼 했으니 그대도 사위로서 도리에 부끄러운 점이 없게 하라’는 말을 할 정도로 가부장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할 줄 알았던 여성이었다고 소개하며, 16세기 조선사회의 역사기술에서 빠진, 여성의 역사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난설헌을 마녀재판의 희생자로 바라보고, 그녀의 관능적인 시를 여성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허난설헌의 시에는 여성의 욕망과 여성의 성, 여성의 꿈이 숨어있다고 평가한다. 살았던 연대조차 희미한 이옥봉의 행적을 추적하는 필자는 옥봉이 남긴 시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며 그녀는 ?시인?이었다고 결론짓는다. 현처로만 부각되었던 안동 장씨는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요리책을 남겨 오늘날에도 생활사와 민중사를 엿볼 수 있게 한 여인으로 다시 조명되고, 조선시대 여성 교육서였던『자경편』은 김호연재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삭인 ‘여성의 경험을 여성적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으로 가치매김 한다. 임윤지당은 여성 중에서 뛰어난 철학자가 아니라 성리학의 이치를 깨닫고 남녀평등을 이야기한 그 시대에 뛰어난 성리학자로 중심 이동을 꾀하고, 임윤지당의 이론을 이어받은 강정일당의 사례를 들며 역사적 계보를 획득하고자 한다. 직업이 신분이었던 조선시대, 제주도, 그것도 여자라는 지리적, 신분적 제약을 현실적으로 걷어내고 대궐과 금강산 구경을 한 김만덕의 일생은 자기 운명과 자기 삶의 지혜로운 경영자로서 모범적 사례로 손꼽을 만 하다. ‘여자의 도움 없이 역사가 이루어지던가요?’ 라고 따져 물은 김삼의당은 남성사대부의 허구적 미인도와 현실적이지 않은 시에 비해, 몸으로 각인된 현장적 삶을 시로 남긴 건강한 시골 여성 시인으로 부각된다. 열녀 되기의 비참함을 폭로한 풍양조씨, 손가락질 당하는 거리의 예인이었지만 뭇 남성과 여성의 사랑을 받으며 남사당패를 이끌어간 바우덕이, 조국독립을 위해 여성인 몸을 내놓았던 위대한 열사 윤희순 등 삶에 나름대로 충실했던 조선 여인들은 공백상태였던 여성의 역사를 채우는 역할모델로서 필자들에 의해 평가되고 선택되었다. 이들 여성들에 대한 기록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틈틈이 보이는 필진들의 허구적 형식을 빈 글쓰기는 아직도 복원돼야 할 사료들이 산재해 있음을 시사해 준다. 허상을 깨고 퍼즐 맞추기처럼 더듬더듬 꿰매지는 여성들의 역사는 당대의 여성들이 침묵하고 남성들에 의해 은폐되었기에 아직도 많은 구멍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두운 시대에서도 자신들의 기억과 현장적 삶을 은유적으로 토로하고 직설적으로 폭로한 여성들, 온 몸을 던져 박제된 인형이 아닌 살아있는 여성임을 알린 이들이 행적이 ‘너무나 비범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을 이 시대에 글쓰기로 다시 불러일으킨 여성 필진들의 목소리도 같은 선상에서 의미가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39명의 여성들이 ‘대거’ 참여하는 오늘날의 역사현장에 얼마 전 한 정당이 ‘효도 특별법 제정안’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정책의 일환이란다. 효도에 대한 사회적 안정감을 부여하기 위해 지자체별 효자효부(孝子孝婦)상 선정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맞벌이 부부를 유도하는 동시에 육아 부담 역시 여성에게만 떠넘기도 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혼률은 증가하고 있고 출산률은 떨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효녀효부(孝女孝夫)상에 대한 언급은 생각조차 못하고, ‘누가 어느 부모의 수발을 들을 것인가’에 대한 부양의 책임분담은 은폐한 채 제기된 ‘남성가족들만의 효도특별법(안)’은 조선시대 무참히 스러져가고 숨죽여 살아왔던 여성들의 아픈 역사를 짓밟고 나온 발상이리라. 이들의 발언을 타고 넘을 수 있는 더 많은 구체적인 사료와 더 많은 여성들을 되살려야한다. 그리고 현재의 여성들은 그 옛날 시대의 부당함과 이 시대의 부조리에 대해서 말하고 기록해야한다. 여성들의 증언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