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 | [문화저널]
화가의 산 이야기
이상조 전북대 미술학과 교수(2004-09-14 07:22:34)
화가의 산 이야기
차가운 밤하늘 가득 걸려있던 하현달의 그리움
산꾼들에게 산에 즐겨 가는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산이 좋아서’ 또는 ‘산 친구가 좋아서’라는 두 가지 유형의 대답이 돌아온다. 사람과 산...
‘꿈같은 산행’이란 가사가 담긴 산 노래가 있다. 설악가(雪嶽歌)라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항상, 꿈같은 산행이란 좋은 산 친구와 함께 마음에 드는 산행을 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하곤 한다. 또한 산에는 ‘자일 파트너’라는 말이 있다. 줄을 함께 묶고 어려운 난관을 협력하여 함께 극복하는 사람을 말한다. 자칫 생명도 잃을 수 있는 극한의 상황에 처할수록 자일 파트너의 중요성은 커진다. 그런 만큼 산에서 좋은 산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타고난 복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번 산행부터 좋은 산 친구와 함께 하는 행운을 얻었다. 필자가 지도교수로 있는 산악부 O.B로, 현재 ’인도로 가는 길’이란 여행사에 근무하고 있는 장석환군이 호남정맥 종주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재학시절 그와 같이한 산행의 기억이 많이 있기에 너무도 기뻐서 처음부터 함께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오른 곳을 또 다시 오르는 일이 힘들긴 하지만 호남정맥이란 긴 여정을 함께 할 믿을만한 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었기에 그와 모든 길을 같이 걷는 일은 당연했다.
무룡고개를 건너 장안산을 오른다. 조금 오르다 트럭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과 만난다. 정맥 마루금에서 조금 빗겨 위치한 전망대로 쓰이는 팔각정으로 낸 길이리라. 이런 길은 건널 때마다 마음이 저린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 때문이다. 그 길을 건너 숲 속으로 호남정맥은 달리고 있다. 장안산 오르는 길은 의외로 길이 넓다. 그러나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람의 흔적은 자연의 생명력을 떨어뜨리는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길이 넓은 곳은 반드시 숲이 엷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더운 날씨 덕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아침나절인데도 지열이 상당히 높다. 지도에서 샘터의 위치를 확인하고 물을 마음껏 마신다. 높은 지열로 숨이 턱턱 막힌다. 일기예보는 비가 내린다고 했기에 비가 기다려진다. 숲 속 그늘을 찾아 잠시 쉬며 뒤돌아본다. 멀리 백두대간 상의 백운산이 보인다. 1149m 봉우리에 오르니 시야가 탁 트이며 산지사방의 산들이 조망된다. 백운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흰나비가 팔랑대며 잠자리 떼가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불볕더위인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자를 썼는데도 머리가 벗겨질 것 같은 뜨거움에 서둘러 숲으로 들어서다 길에 있는 매미의 벗은 몸을 발견했다. 여름 숲 속의 명창이 어찌 땅에 내려와 흉하게 길바닥에서 껍질을 벗었는가? 한 여름의 더위를 견디다 못해 노래를 접으며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 던지고 급히 피서라도 떠났는가? 아니면 지옥불 같은 뜨거움을 견디며 만물의 귀를 즐겁게 해준 노래 보시 덕에 해탈이라도 얻어 정토로 떠난 것일까...? 짐을 내리고 물을 마시며 가져온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일년 가까이 마음을 괴롭히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은 잊고 있다가도 생각이 나면 곧바로 가슴을 찢는 아픈 기억이었다. 그 아픔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휘둘려 지내던 어느 날 불현듯 천당도 지옥도 마음에 있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그 아픔이 깨끗이 사라졌다. 애초에 내게 아픔을 준 기억은 실제로 있었든 것이었을까? 한 달도 안 된 최근의 일이다. 바람이 분다. 양쪽 어깨가 시원하다. 좋다...
정맥 길 좌우로 개여뀌, 술패랭이, 미모사가 피어 있으나 날이 뜨거워서인지 꽃은 드문드문 피어있다. 한낮의 지열과 태양열에 의해 머리가 지끈거린다. 멀리 장안산이 보인다. 멀리서 보는 장안산은 그 큰 덩치만큼 위용을 갖추진 못했으나 숲에 둘러싸인 정상은 마치 부처님의 턱처럼 부드럽고 후덕한 모습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치 그대로 그 오름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천천히 올라선 정상은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고 좌대 위에 놓인 커다란 자연석에 長安山이라 큼지막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정상 표지석을 잡고 기념촬영을 한다. 돌이 달궈져서 무척 뜨겁다. 배낭을 두고 물과 간식을 들고 숲 속으로 피신한다. 태양이 이글거린다. 여름의 산행은 비가와도 걱정, 날이 맑아도 걱정이다. 자연과 달리 인간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보호받으며 나약하게 길들여지고 있는지 다시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약함을 이기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방향을 잡는다.
숲은 깊고 바람이 없어 공기의 유통이 없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답답하다. “가자!” “가자!” 큰 소리로 외쳐 본다. 놀란 나비가 급히 하늘을 난다. 그 날개 짓에 바람이 인다. 공기의 움직임이 코끝에 느껴진다. 숨통이 트이나 조금씩 피곤해 진다. 장안산 정상에서 30분을 내려와 장안리 지보와의 갈림길에서 간단한 점심을 준비한다. 누룽지와 김치볶음이다. 점심을 먹으며 그 옛날 장수군 계남면 장안리 지보와 번암면 덕산리 덕진의 사람들이 넘나들었을 소로가 있을 법한 곳이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곳을 둘러본다. 아쉬움이 그득하다.
키보다 높게 자란 산죽 밭을 지나 897봉을 향해 긴 걸음을 걷는다. 금년 7월의 마지막 주말 더위는 지금까지의 그 어느 여름의 더위보다 더한 혹독함을 지녔다. 목적지를 당겨 897봉을 지나 지도에 표기된 샘터를 찾아 야영을 하기로 했으나 샘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 계획한 목적지인 밀목재까지 세상사는 이야길 하면서 걷는다. 갑자기 지금 지나는 곳이 모바일 폰의 사용이 가능한 지역인가를 확인하고 싶어 전화를 걸어본다.
밀목재까지 길게 내뺐다. 밀목재에는 수몰지구 이주 마을인 덕산 마을이 있다. 해발 700미터의 고지 마을인 이곳 주민들은 고랭지 채소를 키우며, 깨끗하게 잘 지어진 현대식 가옥에서 여름철 피서객들을 위해 민박도 치며 살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배려로 마을 주차장 옆 작은 공터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만들며 하늘을 본다. 하늘엔 새털구름이 그림 같이 떠 있다. 또한 저녁 무렵인데도 사정없이 내리쬐는 노란 땡볕은, 붉은 기와를 얹고 흰색으로 벽을 칠해 마치 지중해의 마을을 연상케 하는 평화로운 덕산 마을을 녹여버릴 듯한 기세로 덤벼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마을에 산 그림자가 가득 드리우고 맹꽁이 떼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높아질 무렵 마을의 주차장은 주민들의 차와 밤 마실 나온 주민들로 가득 했다. 우리의 야영지에선 그 모습이 주차장 가로등 빛에 의해 역광으로 보였는데 수은등의 푸른빛으로 인해 그들의 모습은 블루(Blue) 그것이었다. 좋은 친구와 맛있는 저녁과 향기로운 술이 있는 야영은 언제나 달콤하다. 밤을 느끼는 순간 하현달을 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내일 오르려는 사두봉 위로 높이 떠있었다. 달은 언제나 그리움을 전하기에 달을 보면 항상 그리운 감정이 샘솟는다.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 윤동주도 그것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작년의 탈레이사가르 원정 때, 6-7천 미터 봉우리에 둘러싸였기에 손바닥만 해진 차가운 밤하늘 가득 걸려있던 하현달을 보며 그리움에 떨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 그것은 심한 가뭄으로 드러난 수몰된 마을의, 반쯤은 남아 눈에 씹히는 마을 어귀의 골목의 흔적과, 남아있는 집터에 진흙을 뒤집어 쓴 채로 아궁이에 그대로 꼽혀있던 무쇠 솥의 모습에서 전해져 오는 징한 아련함보다도 더한 그리움이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모기도 없었지만 텐트에 들어가 눕고 싶지 않은 이유는 오직 그 그리움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