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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신귀백(2004-09-14 07:17:03)
도시가 주인공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사랑의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냉정과 열정 사이?2001>는 상처를 가진 남녀 주인공이 제 짝을 찾아가는 시간의 원근법을 다루고 있다. 서른 즈음의 준세이(다케노우치 유타카)는 시간이 멈춰 선 도시 피렌체에서 휴화산으로 살아간다. 또 밀라노에서 부자 미국인 마빈과 살아가는 아오이(진혜림) 역시 10년 전 동경에서의 애인인 준세이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둘 다 나름대로 파트너가 있지만 돈 많은 남자, 예쁜 여자를 버리고 옛날의 연인을 찾아간다. 그들 곁의 그는 그가 아니기에. 누구에겐가는 휘발하고 옛사랑과는 침전하는 사랑의 패턴은 다소 도식적이지만 해피엔딩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밀라노 명품 숍에서 보석세공을 하며 살아가는 아오이. 스무 살의 그녀는 첫사랑 준세이에게 말한다.?서른 번째 생일날, 피렌체에 있는 두오모를 나와 함께 가 줄 거지??동화 같은 이야기의 시작. 엔터를 치기보다는 붉은 색 우체통을 찾아가고 자전거와 기차를 타는 준세이. 유복한 집안의 자제인 그는 중세 미술품을 복원하는 일을 한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아는, 삶을 아끼는 태도를 보여주는 이 젊은이는 모성애를 자극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옛 애인의 집 곁에 저택을 짓고 그 여자를 쟁취하는 비극을 그린 <위대한 개츠비>와 달리 그는 그녀 주위를 맴돌다 약속을 지킬 뿐. 직업과 도시 풍경의 이미지가 주인공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쉬운 설정이지만 화면은 피렌체와 밀라노 그리고 토쿄를 부지런히 오가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배우나 감독이 영화의 주인인 경우가 있으나 이 영화에서는 피렌체의 아름다움 또한 그 주인공이다. 동양의 도시 도쿄는 근대성을 좇고 서양의 피렌체는 과거의 아우라에 기댄다. 피렌체가 갖는 철저한 수렴의 색채, 고졸하고 단아한 서양의 건축물들에 동양인이 훨씬 눈에 잘 띈다는 감독의 눈썰미에 동의한다. 손톱에 든 봉숭아 꽃물 같은 색깔의 아름다운 지붕들을 헤매는 검은머리 동양인은 이 고전 도시의 아르노 강의 퐁테 베키오 다리, 팔라티나 미술관, 산타마리아 노베라 역, 대성당 어디에서도 잘 어울린다. 결국 가족사의 음모와 오해가 풀리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후, 두오모에서 그 만남의 결실을 이룬다는 어쩐지 만화 같은 플롯을 화면이 뒷받침한다. 피렌체는 잠깐의 시간에도 매혹 당할 수 있는 도시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다빈치, 조토, 브루넬리스키… 이 경건한 천재들이 피렌체를 만든 사람들이다. 몇 백 년에 걸쳐 위대한 천재들의 손길을 거친 건축 회화 역사 인물이 주는 종교적 열정과 심미적 영상이 주는 유럽의 미술관 피렌체. 어루만지고 싶은 조각상들, 박물관과 성당의 건축물들로 가득한 도시는 분지에 둘러싸여 찌는 듯 더웠다. 나는 냉난방도 잘 안 되는 오래된 집에서 살아가는 피렌체 사람들의 좁은 골목을 지나며 ‘전통문화 도시’라는 목표를 세운 전주는 과연 영혼이 있는 도시인가 물어보았다. 자연의 법칙에서 인생은 유한하고 도시는 언젠가 파괴된다. 그러나 이것을 거역하여 옛것을 지킬 때, 덧없음이 아닌 의미 있음을 회복하는 것 아닐까.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꽃의 도시이겠지만 정보화나 첨단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피렌체는 침잠과 음영의 도시일 것이다. 전주도 편리한 미래로만 가는 것을 반성하게 하는, 고귀함을 유지하며 자아를 지키는, 부자가 아니지만 안목이 있는, 먹고 싶은 동네만이 아닌 걸어보고 싶은, 정말 ‘혼불의 도시’로 가기 위해서 우리 전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냉정과 열정 사이>는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지만 일부러 소설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준세이나 아오이의 사랑에 대한 집착은 소설이 낫지만, 첫 키스를 하는 동경의 첼로 연주가 피렌체로 이어지는 부분, 그리고 성당에서의 만남 부분은 영화가 낫다. 향수 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전어회로 소주 한 잔 했을 때, 자신이 열정 없이 냉정만으로 살아간다고 소슬한 바람이 알리면, 비디오 가게로 가시라. 가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고른다면 옛사랑의 잔영이 가을바람과 함께 찾아오리라.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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