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 | [문화저널]
솔베이지의 노래와 30년
도병용 / 1956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현재는 전주에서 도신(2004-09-14 07:16:05)
솔베이지의 노래와 30년
월남전과 유신헌법으로 국내외적 소용돌이가 한창일 무렵, 1972년 10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어느 날 음악시간, 음악실 옆 작은 동산, 이웃 여학교운동장과 이어져 있어 다소 신비(?)스럽게 느껴졌던 그런 비스듬한 언덕에서 우리는 수업 중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담장으로 차단되었다.) 야외수업인지라 피아노대신 아코디온을 맨 선생님의 반주에 맞추어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E.H.Grieg)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마음이 포근해짐을 느낀다. 작가 입센의 청탁으로 극음악용으로 작곡된 곡 “페르퀸트”모음곡중 삽입곡으로, 페르퀸트가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늙고 지쳐 옛 애인 솔베이지에게 돌아와 이 노래를 들으며 안도와 평화 가운데 생을 마감하는 우울하면서도 편안한 쉼을 주는 그런 서정적인 노래를 배우던 시절이 무척 그리워진다. 요즘 랩, 발라드, 락 음악을 즐기는 청소년들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벌써 30여년이 지난 먼 얘기이지만 엊그제의 일처럼 생각되고, 지금도 그런 추억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금보다는 입시열풍이 덜 했던 탓도 있겠지만, 시간만 있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4중창도 하고, 혼성합창도 하고, 그러면서 고교 3년을 지냈던 것 같다. 지금 미국에서 목회중인 김동욱목사, 크리스찬신문사 임종권편집국장, 중학교 과학교사인 오재명선생, 모두 보고 싶은 친구들이다. 당시 남성중창으로 편곡된 곡들이 많지 않아, 닥치는대로 파트에 맞추어 화음을 즐기고, 겁 없이 무대에 섰고, 학교, 교회, 카톨릭센타 등 기회만 있으면 몰려 다녔던 그런 시절이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Good night ladies, 냉면(비불라몰) 등 당시에 많이 불렀던 곡들이 지금도 자주 생각난다.
성탄전야는 꼭 날밤을 새워야 직성이 풀렸고, 한 친구가 우울하거나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해결도 못할 주제에 같이 우울해하고 같이 슬퍼했으며, 진로 때문에 고민에 처해 있을 땐 같이 기도하며 앞날을 설계했던 아름다운 과거가 오늘의 나를 이끌어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친구중 하나가 육사시험에 떨어진 날 포도주 한잔에 취했던 일, 또 그 친구가 짝사랑하는 여고생(現在 내 wife)에게 바람맞은 날 밤에 엿치기하다 이빨 부러진 일, 등 재미있는 고교시절이었다. 예비고사를 앞두고 교회음악회에 관여하다 잠시 내 눈에 들어 마음 설랬던 후배 여학생과의 풋사랑은 훗날 그 여학생의 친구인 내 wife를 가끔 질투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고교시절을 마치고, 대학생활, 수련의, 군의관을 거치는 동안에도 간혹 중창과 합창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고교시절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또 다른 중요한 순간, 사건이 많이 있었지만). 90년에 군복무를 마친 후 전주에 내려와 근무지, 가정, 교회를 습관처럼 쳇바퀴 돌 듯 하던 중, 지난 96.11.5 박상만선생님과 마음과 뜻이 맞아 전주 남성합창단을 창단하게 되었다. 이전에 여러 합창단과 교회 성가대 등에서 활동하던 분들 중, 남성들만의 화음, 무게, 진수(眞髓)를 갈급해 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여러 분야(교사,교수,공무원,자영업,의사,치과의사,한의사,등)의 비전공자(대부분)들로 구성되어 처음 창단에서 3회 연주 때까지 내가 단장을 맡았다. 옛날엔 그래도 음악에 대해, 그리고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조금은 자신감이 있었는데, 남성합창단을 하면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고 말아 버렸다. 모여서 지내고 보니,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모두들 쟁쟁한 아마추어들로 또한 장기(長技)들이 풍부한 분들이었고,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왔던 것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어디에서든 테너파트에 속했었는데, 이 합창단에 와선 감히(?) 테너에 낄 수 없어 1st Bass에 안주하게 되었다. 풍부한 성량(聲量)도 못되고, 그렇다고 미성(美聲)도 아닌지라, 그저 조용히 내 파트에 열중하고 결석하지 않으려 매주 화요일은 모든 약속을 만들지 않는 편이다. 금년 11월엔 8회 정기연주회, 그리고 9월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순회연주도 갈 예정으로 찜통더위에도 쉴틈없이 연습하고 있다.
내가 의사(醫師)의 길을 걷고는 있지만, 남들과 달리 겪지 않아도 될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거쳐 오늘까지 왔다. 때로는 자포자기할 뻔도 했고, 넘어져 회복하기 어려웠던 순간들도 있었다. 언젠가는 어디론가 멀리 도피(逃避)하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방황하여 나를 아껴주는 분들께 심려를 끼친 적도 있다. 그런 어려웠던 시절 속에서도 합창활동을 계속하였고, 또 그러면서 조금씩 회복되어 어느 정도 괜찮아진 지금의 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셨고, 또 실족(失足)치 않게 지켜주신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심신이 지치고 피곤한 날, 합창단에 가서 연습하다 보면, 만들어지는 화음 속에서 평안과 쉼을 느끼는 때도 있다. 특히 성가곡을 부를 때 마음이 차분해지고 더욱 깊은 쉼을 느끼게 되는데, 우리 합창단의 주요 곡(曲)중 하나인 “죄 짐 맡은 우리 구주”는 부를 때마다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아 좋아한다.
이렇게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 어린 시절부터의 음악과의 인연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은근하고 끈끈하게 이어져 온 그림자와 같은 관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음악이 나에겐 추억과 평화를 가져다 준 정도이지만, 더욱 큰 역할을 하는 수도 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자(者)들 중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던 자들에게서 그 역할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류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실천한 알버트 슈바이처(A.Schweitzer)박사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으며 또한 의사였지만, 평생을 두고 바흐(J.S.Bach)음악을 연구한 바흐음악의 최고권위자였고 오르간 연주자였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사랑과 헌신을 실천한 박애주의자의 숨결의 원천은 그의 신앙과 신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담긴 바흐음악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아인슈타인(A.Einstein)의 음악에 대한 특별한 열정과 탁월한 음악성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뿐 아니라 아울러 음악을 사랑하였고 매우 검소하고 또 친절했다고 한다. 16세 때 물리학에 근본적인 변혁을 초래할 최초의 착상, 즉 상대성 이론을 공식화한 아인슈타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물리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원동력은 음악적 감각의 결과이다. 나는 이 문제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직감의 원동력은 음악이다. 나는 6세 때부터 부모님의 권유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나의 새로운 발견은 이 음악의 세계에 열쇠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모든 학습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 음악적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주었다.
음악을 통하여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무한한 가능성과 심지어 전능자에게 접근하는 위대함을 보는 것 같다.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예체능과목을 홀대(忽待)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근시안적인 교육 정책에 환멸을 느낀다.
나도 이젠 반년만 지나면 반백(半百)인 쉰 살이 된다. 뒤돌아보아 후회스러웠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음악을 좋아했고 사랑했던 시절들과 순간들 때문에 더 많은 즐거움과 안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한 더욱 음악을 사랑하며 즐기고 싶다.
나에게 “솔베이지의 노래”와 관련된 추억을 남겨주신 김병암 음악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는 이달의 필자가 다음 필자를 추천하면서 바통을 이어나갑니다. 이달의 필자인 도병용씨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이셨던 전봉권씨를 추천했습니다. 전봉권씨는 현재 전주 영생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