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 | [안영이노의 문화비평]
나의 영웅을 찾아가는 여행 프로젝트
안이영노(청소년문화교육연구소 에이스벤추라)(2004-09-14 07:14:53)
나의 영웅을 찾아가는 여행 프로젝트
서울시 대안교육센터에서는 올해 상반기, 대안학교를 다니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여행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우리 팀이 이를 준비하는 교육워크숍을 진행했다. 여행 프로젝트는 자발성과 자기 삶에 대한 기획력을 키우기 위한 일종의 교육적 이벤트다.
청소년 스스로 여행의 주제를 정하고, 여행을 통한 학습의 목표를 분명히 하며, 체계적인 준비, 동료간의 협동작업, 그리고 기획자답게 스스로의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가 바라는 바다. 우리 팀이 진행한 여행준비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은 미리 갈 곳과 움직이는 경로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하고, 그것을 통해 공부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잘 준비한 여행계획이라면 자신들의 그룹이 정한 주제로 여행 중에 자연스러운 토의가 이어질 것이고, 돌아온 후에도 기록과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생활을 통해, 자기 주도적 기획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겪게 된다. 청소년문화교육을 맡아오면서 전 생애를 거쳐 기획자답게 자기의 일상을 관리할 필요와 습관을 들이는 것이야말로 탁월한 문화기획자의 기초소양이라고 청소년을 가르쳐왔다. 자신의 인생에서 축제공간처럼 다가오는 여행이라는 시간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청소년에게 여행은 스스로 기획하는 자신의 문화적 프로젝트다. 워크숍을 통해 여행은 자신의 생애 중 일어나는 뜻밖의 선물 같은 이벤트, 일상에서의 탈출을 의미하는 축제적 시간, 생활의 혁신을 가져오고 인생의 고양을 가져오는 주기적 의례 혹은 인생 문제를 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성인식과 같은 통과적 의례 등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설정한다. 물론 이런 어려운 말없이, 청소년들에게 다가가는 여행은 축제나 록 밴드, 놀이와도 같이 설레는 것이다. 우리 전문강사들에게 청소년 축제와 마찬가지로 청소년 여행은 배울 기회와 더불어 자신을 표현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공간이자 교육적 장치다.
청소년들에게 여행은 축제다
서울시 대안학교는 여행프로젝트에 욕심을 얹어, ‘나의 영웅을 찾아라’라는 테마를 걸었는데, 이것이 어른들의 생각과는 달리 청소년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나만의 영웅을 찾으라는 어른들의 교시가 없더라도, 아이들은 스스로의 길, 자신의 우상, 자신이 꼭 배울 바, 도달하려는 이상향 등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난다. 어른들의 목소리로 말한 ‘나만의 영웅’은 사실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 힘든 표현이 아니며, 심각한 교육적 언어를 부과하여 아이들의 숨통을 죄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의 아이들은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짐작된다. 너무 쉬운 언어로도 세상을 잘 봐온 아이들에게 그런 말은 정보의 불필요한 잉여, 지적 사치, 언어의 과잉이었는지 모른다. 어른들이 부과하는 교육적 언어에 알러지를 가진 아이들은 그런 말을 접하면서, 또다시 어른들의 눈높이로 무엇인가 던져지는구나 하는 오해를 하기 쉽다. 여행을 준비하는 학습 워크숍 중, 대체로 많은 아이들이 영웅을 찾는다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서 당혹스러운 과정을 겪음을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 바로 영웅의 의미를 찾는 토의과정이 이 워크숍에서 언어의 혼돈을 느끼면서 삶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되어야 한다.
대부분 주제 없이 떠나면 되는 많은 여행에 비해 이 고민의 과정은 얼마나 좋은가. 또, 볼거리만 믿고 가는 여행의 습관 이상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여행의 주제를 정한다는 것은 볼거리 같은 단순한 소재에서 호기심과 동기를 얻는 것에서 좀더 나아가 여행을 통해 자기 삶의 모티프를 찾는 것. 테마 없이도 잘 진행될 수도 있는 콘서트에 연출가의 시놉시스와 기회자의 컨셉트를 애써 넣는 이유도 그렇지 않은가.
좀더 거창하게 보면, 거칠어도 좋으니 오늘의 화두를 찾는 것이기도 하다. 좀더 소박하게 말하면 여행의 주제의식을 가짐으로써 허튼 여행이 아닌, 학습이 되고 교육이 되는, 마치 성장통과도 같은 여행을 계획하자는 것이다.
자기 삶을 기획하는 청소년
이 여행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교육워크숍 중 서울시립 청소년센터인 스스로넷에서 진행했던 토의과정을 소개한다. 스스로넷의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서너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의 여행계획을 몇 주에 걸쳐 준비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여행이 축제와도 같으며, 학습과 자기성장이 있는 것임을 쉽게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워크숍에 참가하는 청소년들은 자기 삶을 기획하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축제기획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영상이나 만화와 같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안을 써가며 계획 세우는 것만큼이나, 자기 여행에 대해서도 기획이 중요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의 삶에서 조그만 것을 잘 기획하는 사람이 커다란 프로젝트을 잘 기획할 힘을 갖는다는 것을 짧은 시간에 전달했다. 작은 저예산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잘 만들어본 사람은, 아무리 커다란 대형 이벤트나 페스티벌이라도 무난하게 만들 지식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전달했다. 자신의 몸을 닦아야 집안 살림을 할 수 있고, 나 주변을 잘 돌봐야 세상을 이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행 프로젝트가 이처럼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원칙이나 논리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날 스스로넷에서 진행 중인 4회째의 워크숍은 나만의 영웅을 찾으라는 쉽고도 어려운 화두에서 모두 멈춰서 있었다. 역시 많은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영웅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데 많은 혼돈을 겪으며 시간을 보냈다-즉 자신의 길,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추구하는 이상향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고민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청소년은 교사의 머리 꼭대기에 앉는다.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강사가 제시한 내용을 많이 암기하거나 쉽게 이해하거나 빠르게 습득하는 게 아니다. 강사가 왜 지금 여기서 이것을 제시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나머지의 전달하는 내용을 쉽게 와 닿는다. 그것을 해석학에서는 의도(intention)라고 부른다. 오히려 강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거나 빠르게 습득하는 것은 강사의 이러한 교육의도를 알면 일사천리로 된다. 인간은 같은 이해의 지평 위에서 설 때 소통되기 때문이다. 어려운 학문도 친구간의 대화 같은 바탕이 설 때 쉬워진다. 쉬워지는 것이 공부를 잘 하는 길이다. 따라서, 청소년의 눈높이에 서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토의시간을 통해 강사가 바라는 학습의도를 전달하는 게 낫다. 아이들은 마치 성인이 그러하듯 잘 이해한다.
교사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공부 잘 하는 법이라고 할 때, ‘영웅 + 여행’이 결국 주제 있는 인생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나머지는 청소년들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배우면서 놀 수 있는 여행의 의미로 볼 때, 여행 준비하는 법은 가르칠 문제가 아니라 알아서 독학하고 스스로 정리하면서 깨우칠 바다.
여행의 영웅은 자신이다
여행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영웅을 찾으라니 어려운 이가 있다. 가고 싶은 곳을 말하지만, 그곳에 가는 취지를 억지로 끄집어내지 못 하는 솔직한 이가 많다. 심지어 여행가고 싶은 곳조차 없는 무력한 아이, 그런 생각을 이전에 해본 적 없는 상처받고 무심한 아이도 있다. 이들 스스로 영웅을 이끌어내려면 지난한 시간을 기다려줘야 한다.
모두 ‘영웅 찾기’라는 생뚱맞은 주최자의 요구 앞에서 막혀 있기에, 그런 데 얽매이지 말고 먼저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그 위에 주제를 만들어 얹으라고 했다. 자기 인생 속의 과제는 언제나,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 우선 갈 곳을 즐겁게 정하고 다음에 주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주제를 의인화시키기를 바랐다. 그게 바로 영웅인데, 꼭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만날 사물, 미디어, 사건의 현장, 장소가 다 영웅이다. 영웅은 내 사색을 도와줄 매개물일 따름이며, 일종 나를 위한 해설사다. 영웅은 역사상의 위인도, 내가 만날 스타도 아니며, 단지 스타들의 콘서트로 날 안내할 가이드여도 된다. 동행하는 내 친구가 영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영웅이라는 주제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 순간, 아이들은 스스로 부과된 짐에서 벗어나 이런 생각에 도달하는 창의성이 있다. 여행을 인생의 탐험시간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나의 친구들을 소개한다’는 조병준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 평론기나 문화유산에 여행기와 수필의 의미를 부여하며 답사한 유홍준 교수의 오래 묶은 글도 권할 만 하였으나 의도적으로 피했다. 이미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생활 주변의 네 가지 예를 들었다. 하나는 부산 시내의 모든 나이트클럽을 돌아보기 위해 아르바이트 비용을 마련하여 10여 곳을 경험하는 일을 완수해낸 후배의 젊은 시절 이야기였다. 자기 삶의 기획자는 유흥가도 계획 세워 여행한다.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어두운 한국인의 표정을 보면서 순박한 미소를 가진 사람들과 개방적인 문화를 가진 동남아의 도시들을 생명력 넘치는 이상향으로 삼게 되었던 이야기를 했다. 세 번째로 전쟁기념관에 가기 전에 자료조사를 하는 습관을 이야기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인류의 재앙인 전쟁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사막에 대한 조사를 시켰더니, 툰드라 지대에도 사막이 있으며, 환경파괴 지역을 모두 사막으로 규정한다는 점을 스스로 발견하면서 지구생태 문제를 정리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친구들은 덕적도에서 3.1운동 대신, 선사시대의 유적을 보고 가상의 인물인 선사시대 조상을 영웅으로 만나자고 한다. 어떤 친구들은 자신이 평소 가고 싶었던 마술쇼, 콘서트순례, 요리배우기 등을 제시하면서, 바로 그 취미가 자신의 영웅이었다고 말한다. 바닷가에 가고픈 친구들은 ‘영웅으로서 자연’을 이야기하며 아무 대가 없이 우리에게 준다고 자연을 의인화한다, 평범한 사람을 백사장에서 인터뷰하면서 누구나 영웅-반영웅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못 가본 곳을 준비과정에서 우리 노력이 영웅이 되기도 하고, 잘 아는 곳을 갈 때는 더 심도 있는 조사를 통해 새로운 영웅을 발견하기도 한다. 돈 없어도 제대로 놀고 오겠다며 자신의 꿈을 백수에 둔 친구들이, 백수를 미래를 준비하면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개념으로 쳐다보기도 한다.
이제 여행 준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팀이 바라던 것은 자기 삶을 기획하고, 자신의 경험을 정보화하는 청소년, 스스로 자신의 계획을 만들면서 소통하는 힘을 길러나가는 청소년이다, 사사로운 여행 하나를 통해서도 학습자, 지식인이 되어가는 청소년, 노는 법을 알고, 어떻게 잘 즐기고 표현할 것인지를 조리할 능력을 가진 청소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