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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 | [문화와사람]
“멀리서 징소리라도 들려오면 가슴이 뛰었다”
최정학(2004-09-14 07:13:46)
“멀리서 징소리라도 들려오면 가슴이 뛰었다” 임실필봉농악 보존회장 양진성 “어려서부터 멀리서라도 징소리가 들리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막 뛰었어요.” 전북 임실군 필봉 마을에 위치한 필봉굿 전수관에서 양진성(39) 필봉굿 보존회장을 만났다. 붓끝을 닮은 형상이라고 해서 필봉산이라 이름 붙여진 산자락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필봉마을. 지금은 작으나마 도로가 났지만, 그 전까진 오지 중에 오지였을 그곳에서 양씨는 지난 두 달 동안 필봉굿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탄압에서 전수관으로 그곳은 풍물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으로 보였다. 늦여름의 오후는 그만큼 한가로웠으며, 사방을 둘러싼 진녹색의 산들은 전수관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었다. 200여 명에 달하는 전수자들이 각자 뿜어내는 악기의 땀방울들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크진 않았지만 힘찬 울림으로 사위를 적시고 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이곳에서 필봉굿 전수하는 일에만 전념해온 양씨의 얼굴에서 흐뭇한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풍물 굿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어요. 유신 독재 정권이 민중들의 자생적인 문화를 억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 굿도 거의 없어진 상태였구요. 그나마 풍물 굿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이 한두 명씩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당시엔 지금처럼 ‘전수’의 개념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면서 틈틈이 배우곤 했는데, 남학생들은 낮엔 아버지와 함께 들에 나가 일하거나 산에서 나무를 했고 여학생들은 ‘필봉탁아소(?)’라고 들에 나간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애들을 봐주거나 공부를 가르치곤 했어요. 그러다가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풍물굿을 익히는 거죠. 그때엔 시골이라도 젊은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서로 금방 친해졌어요. 도시 사람들이 우리 마을로 풍물굿을 배우러 온다는 사실에 주민들의 자부심도 있었구요.” 당시엔 마을 굿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도 했지만, 풍물굿을 배우겠다고 필봉으로 들어오는 대학생들에 대한 독재정권의 시각도 곱지 않았다. 운동권학생들이 도피하는 것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전경들의 호위(?)를 받으며, 풍물굿을 치는 진풍경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에 비하면 임실군에서 전수관이 들어설 땅과 3개의 연습동을 지어준 지금은 ‘개벽’이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크나큰 아버지의 그늘 양씨의 아버지는 당대의 상쇠였다. 독재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대학생들을 필봉이라는 오지까지 끌어들인 힘은 순전히 아버지인 故 양순용 옹의 명성이었다. 덕분에 양씨는 장난감보다는 벽에 걸린 아버지의 전립(氈笠)을 가지고 노는 시간이 많았고, 동요보다는 필봉굿 가락을 더 친근하게 흥얼거리며 자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머니께는 꾸중을 했지만, 자다가도 멀리서 징소리가 울리면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뛰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다만 아버지로 물려받은 어쩔 수 없는 피 때문이라고 짐작할 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쇠를 잡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농악경연대회’를 준비하면서부터다. “‘아버지가 유명한 상쇠시니까, 네가 상쇠를 맡아라’라는 것이 선생님이 말했던 유일한 이유였고, 전 아버지가 아닌 선생님에게 쇠를 배워 대회에 나갔어요. 대회에서는 1등을 했어요. 저는 동시에 ‘개인특기상’도 함께 받았구요. 제가 ‘농악경연대회 1등상’과 ‘개인특기상’을 들고 집에 들어간 날, 그동안 아무 내색 없으시던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가락을 가르쳐주셨어요.” 그 후부터 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워나갔다. 아버지가 필봉마을굿을 복원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무동 역할을 하면서 당당한 필봉마을굿패로 역할을 다했고, 고등학교는 풍물을 키운다는 경남 남해고등학교로 진학해 그곳에서도 상쇠를 맡았다. “그 당시엔 풍물 잘 친다는 소리 꽤나 들었고 저도 자신감에 차있던, 한마디로 잘 나가던 때였어요. ‘학생대사습대회’에 나갔을 때 심사를 맡았던 당시 채태영 우석대 국악과 학과장이 ‘너 무지기 잘난 척 하더라’라고 운을 떼면서 저에게 우석대 국악과 입학을 권유할 정도였으니까요.” 풍물굿은 사람들과의 나눔 하지만, 쇠를 잘 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잘 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보다 더 빨리 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가 진정한 ‘굿’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다. “아버지는 풍물은 잘 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잘 치는 것은 시간과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죠. 대신 풍물굿의 본질에 대해 늘 말씀하셨어요. 풍물굿은 사람들과 만남의 지점에 존재해, 서로 이어주고 나눌 수 있게 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셨어요. 단순한 기능적인 행위가 아니라 삶과 결부되어 우리 삶을 이어주고 다져주는 문화행위여야 한다는 것이죠. 풍물굿의 출발점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는 것이잖아요. 열 명이 모여서 하는 것 보다는 백 명이 모여서 하는 것이 더 재밌고 더 다양하구요.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얼마나 잘 조화하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아버지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애정을 갖고 이해해야만 그때 비로써 진정한 풍물굿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셨죠.” 이런 풍물굿의 본질을 가장 담고 있는 것이 필봉굿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가끔 필봉굿의 가락이 쉽기 때문에, 하기 쉬운 풍물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필봉굿 가락이 쉽다는 말은 분명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가락을 현란하게 꾸미는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죠. 필봉굿은 마을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노는 마을굿인데 어려운 가락을 갖고 있으면, 그냥 보기엔 멋있고 화려하게 보일지 몰라도 모든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기 어렵잖아요.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굿을 보는 사람과 치는 사람이 분리되고 단절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마을굿으로써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죠. 반면 필봉굿은 쉬우면서도 모든 사람들을 넉넉하게 안을 수 있는 푸진 가락으로 되어 있어요. 처음 듣는 사람이라도 가락에 맞춰 어깨만 들썩이면 풍물판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제 역할이 생기는 그런 굿이죠.” 지금은 ‘마을굿’의 정서 얘기할 때 일년이면 3천여 명이 풍물굿을 배우기 위해 찾고 있는 임실필봉굿 보존회장인 그는 요즘 새로운 욕심에 차있다. 함께 나누는 문화인 ‘마을굿’의 정서를 되살리는 일이다. “이제 ‘마을굿’의 정서를 얘기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것은 마을문화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해요. 함께 나누고 힘이 됐던 마을문화가 복원되어야 그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지 않겠어요. 마을문화를 복원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마을굿’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도 보존회 차원에서 필봉굿을 ‘마을굿’차원에서 지켜나가고 ‘마을굿’의 정서를 알려나가고 싶어요. 또 하나는 요즘 대학생들 위주에서 벗어나 풍물굿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반인들과 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필봉농악전수관이 우리문화를 체험하는 장으로 충분히 자리매김 됐으면 좋겠네요.” 무슨 경연대회니 하는 순위위주의 ‘싸움붙이는 문화’가 사람들의 생활도 그만큼 삭막해진 요즘, 그가 전파하는 ‘마을굿’의 정서는 그래서 더 반가운지도 모르겠다. ‘나와 너’가 경쟁자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로 묶일 때, 세상은 좀더 푸지고 넉넉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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