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 | [문화시평]
그룹 쿼터의 전주의 역사 설치전
이정훈(전북대 출강)(2004-09-14 07:11:22)
그룹 쿼터의 전주의 역사 설치전
불어오라, 바람아! 상처뿐인 곳으로,* 불어오라 바람아(한영애 노래,작사/이병우 작곡)의 한 구절
나는 전주라는 자궁(子宮)에서 사산되지도, 탯줄을 끊고 벗어나지도 못한 채 30년이 넘게 살고 있다. 바로 이 곳, 천변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에 사람들이 코를 싸잡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을 때나, 자전거길과 유채꽃은 덤으로, 웰빙을 위해 달리는 사람들로 붐비거나 상관없이 전주천의 물이 아무 말 없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 재주가 승(勝)하다고 생각했을 때 전주는 죽은, 월급쟁이들의 도시처럼 보였기에 답답했다. 그리고 어쩌면 삶은 누추한 한 끼 식사의 고마움인지도 모른다는 겸손함이 배웠을 때, 이 곳은 상처의 도시로 다가왔다. 곡창이기에 더 많은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고 수탈에 못이긴 동학도들이 입성하여 권력을 향해 도저한 폐정개혁을 선포했던 도시, 기축옥사의 중심인 정여립이 죽도로 떠나며 밟았던 도시, 남도의 모든 문물이 경도로 향할 때 지나쳐야했던 남문의 싸전다리, 종교의 자유를 위해 동양 최대의 신앙인들이 순교했던 도시, 황석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손님으로 다가온 ‘기독교’와 비견되는 신흥종교가 발생했던 도시, 이미 고려의 훈요십조로부터 시작됐다던 지역차별, 반역향(反逆鄕)의 도시, 그러면서도 풍패豊沛의 고장, ‘귀명창’이 많아 얼치기 소리꾼들을 주눅 들게 했던 도시, 귀신 쫓는 소리를 낸다고해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종이의 고장, 그 종이는 곧 문자의 모태이며 문화의 저장고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아직까지 전주는 옛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니, 이 말은 왕도로서의 자존감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영화는 태생적으로 몰락의 기미와 같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역사를 환기시켜야 하는 이유는 ‘기억’에 있다. 그것은 ‘뿌리’를 강조하는 근본 주의적 고루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이전’을 대면하는 자의 진실이 ‘이후’의 물길을 틀 수 있기 때문에 역사는 기억되어야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19세기 산업혁명으로부터 제국주의의 노선의 부속물로 전락해버린 땅을 제 모태로 삼은 자들에게 아직까지 고질적인 예속 경제의 그늘은 짙게 드리워져있고, 논을 엎어 공장을 세우는 것밖에는 자유무역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만 대물림 할 수밖에 없는, 천상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이 곳에서 문화가 자생하기에는, 재주 있는 자들이 활개 짓은,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넉넉한 삶은 돈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검은 소문 축에도 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이번 쿼터전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소박한(?) 설치물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작가들의 말을 통해서 나는 예술적인 미감과는 상관없이 ‘전주’라는 도시에 무엇이 결핍되었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높이 쌓아올린 드럼통으로 성장하는 전주를 바라는 장광선씨의 작품이나, 철사로 형상화한 번데기로 구태(舊態)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부화되길 꿈꾸는 박은주씨의 소망, 이경곤씨의 불안하기도 하고 완전하기도 한 9수의 빈 채로 매달려있는 붉은 돼지 저금통 9개, 끈으로 묶어놓은 박 속에 비집고 나온 로또와 물고기, 광주리에 놓인 생선 두 마리를 종이로 제작한 박부연씨의 작품, 그는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냐는 말에 한 마디로 말한다. ‘풍요롭잖아요’ 아, 그 말은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전주/전북의 삶은 ‘아직은 빈곤하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쿼터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우선 공동작, 오전 11시에 설치를 한다고 해서 다가교에 나갔는데 회원들은 옷을 걷고 흡사 논일 나온 사람들처럼 오방색으로 구성된 현수막을 전주천에 걸쳐 놓고 있었다. 강폭을 가로지르고 있는 그 현수막은 건조한 표정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큼 원색적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내림굿에서 무당이 온 몸에 오방색 띠를 두르고 뭔가를 풀어버리려고 안간힘을 쓰던 몸짓이 겹친다. 이번 미술제의 부제인 ‘전주의 역사’가 신사참배지였던 다가공원으로부터 다시 새롭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노란색의 현수막 아래 전주천의 물살이 비친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붉은 화살표! 어디로든 가야한다. 그리고 7시부터 시작된 퍼포먼스, 지역민들이 함께 솟대를 감싸고 있는 띠를 잡고서 회전하며 원을 이루고 난 뒤 각자의 소망을 적는 시간엔 심흥재씨의 의도대로 지역민들의 참여가 가장 활발했다. 베개에 가득 적힌 소망들, 10살이나 됐을법한 여자아이의 소망을 살짝 훔쳐봤다. ‘엄마 아빠 오래 살게 해주세요’라는. 심흥재씨의 ‘배개일기’와 동시에 진행된 김용수씨의 퍼포먼스는 드러낸 상체에 오방색의 현수막을 겹겹이 감고 ‘혈(穴)’을 뚫고 나오려는 거북처럼 흐믈흐믈, 엉금엉금 현란하게 색과 몸이 겹쳐진다. 그것을 또한 껍데기 속에서 머리만 살짝 내놓고 우뭉스럽게, 멀리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의 탐색전. 그 외의 참여 작가들의 설치물은 틈새 틈새에, 빛 뒤에서.
퍼포먼스가 끝난 뒤, 조명은 전주의 새 역사의 대어(大魚)를 낚으려는 듯, 바람에 낭창낭창 흔들리고 있는 홍현철씨의 대나무 낚시대를 비추고 그 뒤엔 비닐에 쌓인 붉은 돼지 저금통 9마리를 빛내고 있었지만 어둠은 깊어, 잔디밭에 박혀있는 김영란씨의 비닐꽃이나 다가교의 행인들을 위해 설치해놓은 철사 번데기를, 자연과 인간의 소통을 의미하는 전철수씨의 선풍기망을, 상승하려는 색칠한 드럼통을 비추지는 못했다. 오직 정형화된 역사 속의 인간상을 의미하는 안승환씨의 마네킹이 지나치는 조깅객들의 손을 탔을 뿐. 하긴 기관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았다하더라도 사비(私費)를 추렴해 마련한 자리에 조명을 연결해주는 트럭의 전력만으로 그 모든 작품을 조망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홍현철 쿼터 회장의 말대로 이제 21년이 되어가는 이 그룹은 이제 갓 청년기에 들어섰다. 역사를 찾아나가는 발걸음이 화가의 몫만은 아닐지라도, 문인상경(文人相輕)과 같은 고집이 때로는 작업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 될 수 있는 작가들이 제 화실을 벗어나 길 위에서 작품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길을 떠난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번듯한 카다롤그 하나를 만들 수 없었고 다리 위에 걸쳐놓은 현수막을 비출 조명 하나 없는 그 천변의 풍경!
사진기를 들고 어슬렁거리는 내게 사람들은 묻는다.
‘뭐하는 것예요?’ 나는 도우미가 된 듯 ‘쿼터라는 그룹이 전시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유심히 쳐다본다. 누구는 ‘대체 뭐하는 짓이여. 저런 사람들은 보통 인간들과는 달라’라는 반응에서, ‘오매 이런 것을 어찌 다 만들었다냐’라는 식의 반응까지. 그렇지만 끝내 그들이 정작 쿼터 그룹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는지를 얼마나 알았을까? 문화 산업이라는 요리하기 까다로운 공룡을 상대하기 위해서, 축제도 아니고 평면회화전도 아닌 지역 속의 설치 작업은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문을 열고 기꺼이 구체적인 현장 속으로 개입되고 싶은 무수히 많은 쿼터로 지칭되는 청년 정신들에게 미리부터 죽는 시늉을 배우게 한다던지, 노회(老獪)한 제스츄어만을 껴입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처럼 익숙한 침묵에 음습한 독기를 품고 사는 자들을 화들짝 일깨울만한 상상력의 도전은 영원히 만날 수 없을테니까.
그 날, 쿼터의 조명이 다가교 밑을 비출 때, 어둠을 베개 삼던 서넛의 homeless들은 며칠만 참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등 돌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