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 | [문화시평]
젊음, 내면을 들여다보자
구혜경(2004-09-14 07:09:35)
젊은 시각전
올해도 어김없이 미술화단의 비수기라고 하는 8월 한 여름에 ‘젊은 시각전’이 열렸다. 대체로 방학과 휴가가 있는 여름엔 전시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래도 볼거리 풍성하게 세 명 젊은 작가들의 개인전이 릴레이로 보여져 다행이다. 벌써 6회를 맞으면서 그 동안 젊은 시각전을 거쳐 온 작가만도 10여명이 넘고, 작년에는 5년을 마감하는 ‘젊은 시각, 그 후’라는 타이틀로 중간 정산하듯 전시도 있었다. 참여했던 작가들도 대부분 제자리에서 각기 제 몫을 하며 버티고 있다. 이 기획전이 처음 만들어질 때 가졌던 젊은 작가를 위한 의도는 전북화단에서 참신함과 미래지향적인 모습으로 지금까지도 비춰지고 있고, 많은 젊은 작가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젊은 작가 부재현상으로 마름모꼴이 되어가는 전북화단에 참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몇 해를 거듭해오면서 처음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도가 강하게 보이고 있어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그 몇 가지를 얘기해본다.
먼저, ‘젊은 작가’라는 단어 개념의 문제다. 흔하게 우리들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작업하는 20대 초중반부터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그 상한선은 전시나 사람마다 기준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이 전시에서는 35세 미만으로 잡고 있지만 대부분 40세, 또는 더 멀게는 45세까지도 잡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나이만을 가지고 기준을 삼는다는 것에는 무리수가 많다. 어쩌면 나이에 상관없이 톡톡 튀고 늘 새로움을 갈구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들 또한 젊은 작가가 아닌가 싶다. 가끔은 나이에 맞지 않게 신체는 20대이면서 작업태도는 원로가 된 듯한 작가들도 보이니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로 이루어지는 전시에 꼭 나이를 두고 하는 것 보다는 작업에 대한 열정과 태도를 젊음의 기준으로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전시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 활동에 있어서 ‘젊음’이 무엇이고,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개념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그들만의 기준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또, 이 전시의 기획에서 참신한 것은 젊은 평론가와 젊은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고 작가활동에 있어서 발판을 마련하는 밑거름이 되고자하는 의도에 있다. 대부분 전시 경험이 많지 않은 작가들은 자신의 내면을 작품으로 표현하는데 미숙하기도 하고, 여러 방법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을 때가 있다. 이러한 것들을 평론가의 일방적인 통보 형 글이 아닌 긴밀한 관계에서 풀어나가자는 의도에 깊이 동감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쯤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괜찮은 젊은 미술가 부재현상과 마찬가지로 젊은 작가와 마인드를 같이 할 이론가의 부재현상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신선한 이론가를 섭외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감안하고 일단 선정된 이론가와 작가는 얼마만큼 긴밀한 소통이 이루어지는지 진단해 보아야 한다. 처음의 의도가 희석되어 단지 형식적인 만남에 그치고,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보여지는 작품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불필요한 소모전일 뿐이다. 이론가와 작가는 평행적인 관계 안에서 긴밀한 소통이 될 때 올바른 비평문화도 형성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한 선정방식의 문제들이다. 지금은 작가가 포트폴리오를 들고 화랑을 찾아간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포트폴리오 접수로 작가를 선정한다는 것은 굉장한 전북 미술 발전의 변화이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도 많았고 방관하는 이도 많았으나 지금은 정착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개념은 정착이 되어가지만 미술가 부재현상으로 인한 악순환으로 초기 실행할 때의 신청자는 이제 그 절반에 그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보와 선택의 폭이 좁아져 의도에 맞는 작가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뿐 아니라 자칫 끼워맞추기식이 될 우려가 있다. 또한 작가들의 안일한 생각으로 무조건 될 거라는 식의 발상과 선정되지 않았을 때의 수치심으로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는 소극적인 성격은 이제 접어야 한다. 물론 화랑측도 함께 고민해야 될 부분은 적은 숫자의 포트폴리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스스로 발판을 마련하여 직접적인 지원이나 육성 등 새로운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필시 이것은 어느 한 개별적인 화랑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젊은 시각전을 통해서 다시금 둘러보게 되는 전북 화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젊은 시각전에 참여하고 있는 임현채, 고형숙, 김명숙은 각기 자기 색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것, 또는 주변에 관한 것 등 가까운 일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감흥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을 보면서 요즘의 젊은 세대 작가들이 지향하고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젊은 시각전만을 보면 몇 년 전에 비해 작품의 성향은 많이 간결하고 산뜻해진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어쩌면 표현상 가벼워졌을 수도 있고, 또는 익숙한 일상적인 생활을 표현하듯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형식과 표현이 세련되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작가로서 지녀야할 것은 ‘무엇을’, ‘왜’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이것이 없이는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얼마만큼 이러한 것을 고민하며 했을까. 작가 스스로 진단하고 개선해야 될 문제이기도 하고, 이론가나 주변인들과의 많은 대화로 폭 넓은 수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세 명의 작가는 자신이 화가로서의 방향과 지나온 자취가 점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끝으로 미술시장이 전국적으로 침체기라고 하지만 그냥 방관만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각자의 실정에 맞게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한데, 작가 부재현상으로 보면 젊은 작가의 발굴과 육성도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발굴되고 육성된 작가들이 자생할 수 있는 발판 마련도 시급하다. 침체되어가고 있는 화단에 즐겁게 동참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것을 기다리기보다 모두가 만든다는 적극적인 마인드로 함께 꾸려가야 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