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9 | [특집]
전라감영 복원의 필요성
이상훈 /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2004-09-14 07:05:39)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면서, 역사문화 유적 공간으로서 지방관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음은 시대적 추세라 하겠다.
특히 지방관아 중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등 3도를 통할하였던 전라감영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1년 당시 경찰서 무기고에서의 뜻하지 않은 대폭발 사고로 인하여 현도청사 뒤편에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던 선화당을 비롯한 부속건물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지금은 단지 현 의회건물 내에 자리하고 있는 회화나무만이 있을 뿐이며, 선화당은 사진으로만이 당시 모습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특히 전라감영지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동학농민 혁명에 있어서 큰 획을 그었던 역사적 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1894년 5월 7일 전라감영 선화당에서의 전주화약을 계기로 집강소가 설치됨으로써 반봉건 제도를 철폐하는 데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또한 선화당에는 대도소가 설치되어 53개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를 총괄한 곳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간 우리 도에서는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문헌자료를 기초로 하여 먼저 조선시대 감영의 성격?직제?주요시설, 전라감영의 연혁?주요시설?배치구성,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전주화약과 집강소와 대도소의 설치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1996년부터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 관련기관의 방문조사 및 감영관련 지역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해 관련 자료를 수집한 결과, 전라감영의 배치도, 관찰사의 정청인 선화당의 사진과 규모, 중수기록과 함께 전라감영이 동학혁명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주부에 설치된 전라감영은 읍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주부 관아와 대칭적으로 위치하였던 전라감영의 초기모습은 알 수 없지만, 18세기『輿地圖書』및『全羅監營圖』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정청인 선화당을 비롯하여 관풍각, 내아 등 많은 시설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의 기록인『여지도서』를 비롯한 19세기의 관련된 읍지를 통해 전라감영의 주요시설을 살펴보면, 먼저 정청인 선화당을 비롯하여 관풍각, 응청당, 포정루 등 25개 시설이,『全州府史』에 의하면, 선화당, 관풍각, 연신당, 내아, 응청당, 포정루 등 38개 시설 등이 보이고 있어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선화당 등을 청사로 활용하면서 많은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1943년에 이르러서는 선화당, 작청, 진휼청, 통인청 만이 잔존하였다. 그나마 1951년 경찰서 무기고에서의 폭발로 인해 선화당 등 모든 건물들이 전소되고, 현재는 정청인 선화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회화나무와 1952년에 신축된 도청사를 비롯하여 의회와 경찰청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조선건국의 발상지이기도 한 전주에 설치되었던 전라감영은 타 지역과 다른 역사성과 차별성이 있다 하겠다. 중국 한나라의 발상지인 豊沛縣이 중국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당당히 하는 것과 같이, 전주 역시 豊沛之鄕?豊沛之地?豊沛御鄕으로 불리우는 조선 건국의 발상지로서의 위치와 함께 조선시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등 3도를 통할하였던 중심지로서의 위상 확보 및 정신적 자긍심을 되찾고자 하는 당위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다. 또한 전라감영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집강소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역사적 장소인 동시에, 당시 집강소를 총괄하기 위하여 선화당에 농민의 대표기관인 대도소가 설치되어 전봉준에 의한 지휘소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어 복원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