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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 | [특집]
전라감영 복원의 의미와 방안
이동희(李東熙) / 전북대학교 사학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2004-09-14 07:04:55)
오늘 날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합쳐 전라도라고 이름 한 것은 고려 초 현종대의 일이다. 그러나 이는 구역을 그렇게 나눈 것일 뿐 전라도를 총괄하는 상위기구로서 행정도제(行政道制)는 아니었다. 5, 6품의 중앙 관리들이 안찰사라는 직함을 띠고 6개월간의 임기로 일도를 순력할 뿐이었다. 종2품의 고위관료인 감사(관찰사)가 일도를 총괄하는 도제는 고려 말에 처음 등장하였다. 창왕 즉위년(1388) 안찰사가 도관찰출척사로 개칭되어 2품 이상의 양부대신이 임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공양왕대에 감사가 일도의 전임관(專任官)으로 개편되어 임기도 1년으로 연장되었으며, 그 예하에 경력사라는 기구까지 설치되었다. 전주에 전라감영이 설치된 것도 고려 말의 일이다. “전라도 선생안(감사 명단)”을 보면 창왕 즉위년에 부임한 최유경부터 도관찰사로 기록되어 있고 임기도 1년이다. 이때부터 군현의 상위기구로서 행정도제가 전라도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전주부성의 수축시기를 최유경이 전라감사로 있던 때라고 하는 것은 감영설치를 혼돈한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전주에 전라감영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명실공히 전주가 전라도의 수부(首府)로 자리하였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전주가 전라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주는 고려 말에 이르러 전라도의 중심도시로서 위상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전라감영은 임진왜란 후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조선후기 감사가 군현을 순력하지 않고 감영에서 일도를 통괄하는 체제로 바뀌면서 감영의 부대시설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전라감영의 확대는 곧 전주부성의 확장을 가져왔다. 조선후기 전주부성은 총 18만평으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으며, 이 중 감영이 차지하는 면적은 1만 2천평 정도였다. 감영 안에는 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 아전들의 집무처인 작청 등 치소만이 아니라 선자청과 지소, 인출방 등이 있었다. 선자청은 부채를 만드는 곳이요, 지소는 종이를 만드는 곳이고, 인출방은 책을 찍어내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대사습놀이를 주관한 통인청도 선화당 옆에 자리하였다. 이처럼 전라감영은 전주의 문화적 특성을 또한 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전라감영은 동학농민혁명시 대도소가 설치된 곳이다. 중세봉건제를 마감하고 모두가 평등한 새 사회를 열어가자는 대변혁운동이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여기에서 전봉준과 김학진이 전주화약을 맺었으며, 폐정개혁을 실현해 갔다. 현재 전라감영의 흔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도청안의 회화나무이다. 그러나 조선말의 전주부성의 모습을 상세히 보여주는 보배 같은 병풍형의 대형 지도 2점이 남아 있다. 전북대 박물관과 전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고지도들이 그것들이다. 지금의 지도와 달리 고지도에는 감영을 비롯해 각 건물의 위치와 형태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우리 옛 지도는 하나의 회화이다. 거기다가 선화당, 풍낙헌(시청) 등 주요 건물들 사진이 남아 있고, 일제시대의 지도와 전주부사 등을 통해 주요건물들이 위치했던 번지수와 건물 규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도청에는 작촌선생 등으로부터 감영 건물 등의 위치에 대해 녹취해 놓은 자료들이 있다. 여기에 내년 7월 도청이 이전된 후 적절한 발굴이 이루어지면 옛 건물들의 흔적이 찾아질 수도 있다. 따라서 감영 복원은 가능한 일이다. 선화당 건물은 1951년까지도 남아 있었다. 전라감영의 복원은 전근대 찬란했던 전주 역사의 복원이며, 화려했던 전주의 영광을 되살려 놓는 일이다. 이는 지역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 넣는 일이며 대외적으로 전주의 역사문화를 각인시키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감영의 복원은 그 의미가 지대하다. 특히 전주가 전통문화 중심도시를 표방하는 시점에 감영의 복원은 더욱 필요하다. 전주가 전통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관련한 특별난 볼거리들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전주는 도시 분위기 자체가 전통적이다. 감영 복원은 전통도시로서 전주의 분위기를 더 고조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근래에 감영복원에 대한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감영이 복원되고 문화재로 지정되면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구도심이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영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반경 500m안에는 개발에 제한이 따르게 되고, 이에 따라 상권이 위축되는 등 구도심 활성화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충분히 경청해야 할 이야기다. 문화유산을 보존한다 해서 산자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도청부지를 확보해 장기적으로 객사에서 감영, 풍남문, 남부시장, 한옥지구로 이어지는 전통문화구역 설정의 포석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도 존중될 필요가 있다. 전주가 전통중심도시로 나아가려 할 때 더욱 그렇다. 감영복원을 한다 해서 모든 건물을 다 복원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감영지를 보존하고, 여기에 선화당을 비롯해 통인청, 선자청, 지소, 인출방 등 전주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몇몇 건물들만 복원하자는 이야기다. 사실, 2000년 9월에 이미 전라감영지가 전라북도 기념물(107호)로 지정되었으며 감영복원과 관련해 중앙으로부터 500억을 지원받은 상태다. 이제 도기념물을 해제하자는 것인데, 모양새도 그렇고, 문화재 지정을 해제한다고 해서 자유스런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영지 앞뒤에 풍남문과 객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건축물들은 모두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즉 전북도에서 감영지를 문화재에서 풀어도 국가문화재인 두 건물의 반경 500m 안에 감영지가 위치하고 있음으로 이 일대는 문화재보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해제만이 능사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감영터가 문화재에서 해제될 경우 전라감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감영복원은 요원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전주는 전통문화도시를 표방하면서 스스로 문화유산을 버리는 꼴이 된다. 무엇이 구도심을 살리고 전주를 살리는 일인지 장기적인 안목에서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하루아침에 정책을 바꾸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몇 년간 감영복원을 추진하다가 반대여론에 떠밀려 정책을 선회하는 것 같은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 도에서 발주한 감영 일대를 포함한 구도심활성화 방안에 대해 연구용역이 진행되고 있고, 전주시에서도 이런 연구를 계획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전문가들도 감영복원문제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다. 도와 시, 그리고 전공자들이 뜻을 같이해 감영지도 살리고 상권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고, 그래도 방법이 없을 때 어느 하나를 선택하자. 그랬을 때 충분한 검토 없이 어느 하나를 선택해 우를 범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전라감영의 역사와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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