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서평]
정론을 압도하는 ‘신소리’의 힘
이광철 / 국회의원.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전주완산을에서 당선되었다. 국회 문화관(2004-08-12 06:32:03)
익산 출생으로 적(籍)을 올려 군산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머리 굵어진 이후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전주에서 여러 일에 상관하며 살아오는 동안 ‘이광철은 마당발’을 자처하며 전북 곳곳을 휘돌아 다녔다.
그런데 정작 우리 전북의 큰 어른 한승헌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마당발은 무슨, 허당도 한참 나갔구나, 하는 아쉬움 속에 ‘산민객담’을 펼쳐 들게 되었다.
전북에 태를 묻은 사람이라면 우리 고장이 배출한 거인으로 한승헌 선생님 함자가 갖는 무게와 그 넓은 그늘에 대해서 고개 숙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만 책을 읽어가는 동안 여러 곳에서 다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구, 이크, 하하, 깔깔깔. 절로 터져 나오는 추임새에 흥을 맞춰 참으로 오랜만에 유쾌한 책 읽기를 하면서도 행간 곳곳에 숨어 있는 엄정한 삶의 자세에 긴장하게 된다.
진안에서 태어나 전북대 정치학과 졸업, 검사를 거쳐 변호사로 독재권력에 핍박받는 양심수와 정치범들의 변호에는 호가 나신 양반. 당신도 두 번에 걸쳐 감옥살이를 겪었고 ‘민주’와 ‘국민’이 들어간 단체라면 좀처럼 빠진 일이 없는 대표적 재야인사. 김대중 정부 초기에 감사원장으로 봉직한 외에는 관(官)과는 한참 거리를 두고 사셨지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전북대학교발전후원회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등 일감 많고 누군가 나서기 힘들어하는 일에는 기꺼이 몸을 대주신 분. 쓴 책만도 20여 권.
한승헌 함자 뒤로 이어지는 굵은 선의 이력만 꼽아본다면 풍채는 무골에, 글은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으로 시종일관 가파르지 않을까 예단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웬걸, 직접 마주 대하면 노상 웃음 끼를 머금은 얼굴에 눈빛만 형형하게 빛나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 때문에 이 분이 정말 그 유명한 한 변호사님인가, 되묻게 된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방문객처럼 잠깐의 혼돈에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 건너오는 산민의 유머는 상대방을 부드럽게 풀어주곤 한다.
이 책의 곳곳에서 깡마르고 꺼무스름한 얼굴 때문에 ‘풍채’로 대접 받은 일은 없었노라고 짐짓 애둘러 가는 대목이 나오지만 함자를 대면 바로 연상되는 그 간디풍의 ‘풍모’ 때문에 한승헌 선생께서는 천상 ‘재야’ ‘선비’에 딱 들어맞는 삶을 살아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 처지에 <산민객담>에서 가장 와 닿은 글들은 아무래도 2부 ‘법창 안팎’ 과 3부 ‘어둠 속에서’였다. 법창(法窓)이라! 점잖은 표현이지만 그 말이 대개는 감옥살이나 재판에 관련된 일일진대 이런 저런 일로 법창 안팎은 제법 겪어본 축이라 우선 구미가 당겨 가장 먼저 손길이 갔다. ‘어둠 속에서’는 검은 그늘이 짙게 드리웠던 군사독재통치 치하 연간의 일들을 다룬 글이라서 아는 이름이 나오나, 사람 찾는 재미에 술술 읽혔다.
그중 ‘명답’과 ‘진풍경’ 같은 글은 법정에 걸음이라도 한 번 해본 사람은 금방 웃음이 배어나올 정도로 법정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형사재판에 피고인으로 나온 한 아주머니가 사는 곳을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주소 대신 집 찾아가는 길을 상세히 설명하는 대목에 재판부와 방청객 모두가 폭소를 터뜨리는 장면은 딱딱한 법정에 사람의 향기를 불어 넣는다. 반면 피고인의 진술을 한사코 제지하는 재판부와 한마디라도 더하고자 하는 학생의 공방이 이어지는 군사정권 치하의 법정 풍경을 그린 ‘진풍경’ 같은 글은 우리 사법의 아픈 과거를 뒤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나도 민주화운동 시절 꽤 여러 차례 법창을 드나들면서 우리 사법제도의 낡은 면면을 지켜본 형편이라 솔직히 검사, 판사와는 친화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매번 진실을 호소하며 ‘사법적 정의’ 운운해가며 재판에 최선을 다해봤지만 결국은 몇 년 씩 앞뒤 꽉 막힌 골방에 나를 밀어 넣은 그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낄 리 있겠는가.
그럼 변호사는? 고비 고비 힘든 재판에서 수임료는커녕 자비까지 털어가며 인권변론에 시간을 내주던 몇몇 변호사님들이야 지금도 정겹게 인사를 주고 받는 처지이지만 내가 목도한 그 수많은 ‘개털’ 재판에서 ‘국선’은 말할 것도 없고 ‘사선’ 변호사들도 한결같은 풍경의 연출자였다. 박종화라는 젊은 시인의 <국선변호>란 시였던가(1990). 우리 사법현실을 촌철살인으로 압축한 그 시는 딱 네 줄로 끝난다.
도둑질 인정하지요
배고파서 도둑질 했지요
맞지요
이상입니다
변호사의 네 줄 변론이 끝날 무렵, 피고인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한참동안 머리를 들지 못해야 이 변론은 제대로 완성되는 법이다.
처음에 이 시를 읽었을 때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몇 번 더 재판을 지켜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는 것이었다. 서류재판에 주로 의존하는 우리 현실에서 장황한 변론을 늘어 놓아봤자 괘씸죄를 더하기 밖에 하겠는가. 빨리 죄를 인정하고 저 높은 재판관을 향해 한없이 낮은 자세로 읍소하면서 ‘죄지은자’를 자청하는 것이 빨리 저 지긋지긋한 옥창을 나서는 지혜로운 길이야. 구질구질할 것 없이 참으로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기댓값에 부응하는 명변론이 이 네 줄 변론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스물스물 피어나는 것이다.
‘송사(訟事)’가 ‘역병’ 만큼이나 나쁜 수에 속하는 토정비결 운세풀이처럼 우리 현실에서 피고인의 처지로 법정을 체험하는 경험은 그만큼 높은 권력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낮은 백성’의 처지를 실감하는 일이었다.
한승헌 변호사님은 바로 그 높은 단상에서 스스로 내려와 어두웠던 시절을 부당하게 짓밟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분이다. 스스로 포승에 묶이는 피고인의 신세로 ‘전락’하면서도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한 변호사의 남다른 삶에 ‘산민 山民’이라는 아호는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해본다.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 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산민객담>을 단숨에 독파하고 나니 문득 이 책 제목이 너무 부당한 것이 아닌가 항변하고 싶어진다. ‘신소리’의 모양새를 띠긴 했으나 어설픈 정론을 뛰어넘어 진실의 한복판을 울리는 이 글의 품격을 ‘객담’이란 말로 담기에 너무 아쉽기 때문이다.
펴낸 글에서 스스로 밝히셨듯이 “때로는 정담이나 방담이 설교나 웅변보다도 정직하고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구체적 물증을 우리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너무 생생해서 지긋지긋한 이 현실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고 얻어지는 해학이야말로 우리의 심성과 정서를 윤택하게 하여주는 보습제”라는 선생의 말씀에 누구나 동조, 고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의 향연이야말로 “우리가 비정한 현실과 화해.공존할 수 있는 ‘햇볕정책’이기도 하다”는 선언에 나 또한 열렬한 햇볕정책의 지지자, 계승자가 되어 볼 생각이다.
청년시절 수만 대중 앞에서 열변을 토하면서 제법 말깨나 한다는 소리를 들어온 처지였지만 이제 돌아보니 해학과 재담 한 마디에도 우리 현실을 깊게 담아온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에 비하면 겨우 남들의 귓전을 울리는 모기소리에 지나지 않았나 자책하게 된다.
‘산민 선생님처럼 가파른 곳에서도 잃지 않는 여유와 넓은 그늘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신소리가 깊어져 정론을 넘어서는 그 경지에 우리도 한번 닿아보고 싶다.’ 여러 번 되뇌어보지만 미욱한 내가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꿈일런가.
기회가 되는대로 선생님을 모시고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객담’ 한 수 청해 듣는 소박한 꿈부터 이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