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문화시평]
보이스 오브 아시아, 낯설음에서 느끼는 깨달음
문윤결 / 사회학(문화사회학)을 전공하였으며 대학 강의와 문화기획 및 문화예술 평론 활동
(2004-08-12 06:27:52)
음악과 종교는 닮은 점이 많다. 둘다 한번 심취하면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점이 그렇고,
또 인간에게 안식을 주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방법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렇다. 하지만 음악과 종교가 더욱 닮은 것은 그것이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교리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숭배한다는 점이다. 교회가 현대적으로 해석된 새로운 교리에 거부감을
갖듯이 우리 시대의 음악가들도 정통 교리와 같은 고전음악의 질서를 거부하는 새로운
음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표현하려고 새로운 음악기법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음악계나 음악 애호
가들로부터 지지받기가 어렵다. 이처럼 다수의 음악인들로부터 동의도 지지도 받지 못하는
일군의 음악가들이 ‘자유로운 음악을 통해서만 행복한 순간을 맛본다’며 장마비가 뿌리
던 전주에서 큰 일을 치루었다.
7월 10일과 11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명인홀에서는 ‘보이스 오브 아시아(Voie of Asia)
- 프리뮤직 페스티발(Free Music Festival)'이라는 특별한 기획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에서
15명의 뛰어난 프리뮤직 음악가들이 완벽하게 자유로운 연주를 통하여 그들의 음악적 욕망
, 기량을 마음껏 풀어내었다. 예원예술대학교 산학협력단이 기획한 이 프로그램은 우리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매우 실험적이고 창의력이 넘치는 독창적인 기획이었다. 초
청된 연주자 대부분이 음악적 기교나 역량 등에서 세계음악계에서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으
며, 또 공연의 주제나 형식 등에서도 매우 새로운 기획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프로그램은 아마도 올해 우리 지역에서 기획된 공연 중 가장 참신한 기획으로 꼽힐만 하다.
이틀 동안 ‘사이를 따라’라는 큰 주제를 놓고 10개의 소주제(내면의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현자들의 잠언이나 선불교의 가르침 같은 10개의 동양적인 화두)를 연주자들이 서로 파
트너를 바꿔가며 10번의 공연으로 풀어내었다.
서로 다른 악기를 사용하는 3명 또는 4명의 연주자들은 50분 동안의 프리 스타일 연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기 느낌을 때로는 경쟁적으로, 때로는 대화하듯 풀어나가는 스타일로
공연을 진행하였는데 매회 공연마다 만들어지는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은 관람객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악기들은 모두 친숙한 것들이지만 그들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악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다. 선율과 화성의 지렛대가 되어야 할 피아노는 리듬을 보태는 타악기가
되고, 오히려 드럼이나 퍼큐션같은 리듬악기들이 소리가 아닌 음정으로 귀에 꽂힌다. 또
명징한 소리로 밤하늘을 뚫고 나갈 것 같던 금빛 트럼펫은 쇠긁는 소리를 내며 우리를
위태로운 감정으로 끌어가고, 새벽 잠을 깨우는 새소리같던 인도의 피리는 한 호흡을 삼킨
뒤에는 연신 새의 목을 비트는 듯한 비명을 토한다. 그토록 심금을 울리던 해금도, 옛 성
현의 수양에 벗이었을 거문고도, 그리고 서양음악의 귀족인 바이얼린마저 철사줄로 줄을
매단 듯 생경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악기들은 연신 익히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고, 연주자들은 한술 더떠
무대위에서 퍼포먼스를 만들어낸다. 통상의 연주회장에서 경험하는 엄숙한 의식같은 연주는
없다. 그들은 악기의 본래 기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건반 대신 피아노 줄을 직접 뜯거
나 두드리고 긁어대는 등 악기의 구석구석을 뒤져 새로운 소리를 찾아낸다. 그들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서 음악적 소리를 찾아내며 악기와 대화하고 춤추면서
새로운 소리를 온 몸으로 표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바로 새로운 소리들의 연속 같다.
이처럼 이곳에는 통상 말하는 음악적 아름다움이란 없다. 오직 새로운 것들의 자유로운
우연과 일치, 교합과 분열을 통한 새로운 깨달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친숙한 것에서
느끼는 낯설음이 강렬하다.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던 음악적 규칙과 질서는 모조리 파괴되
어 나갔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선 사물이 되었을 때 느끼는 생경함
과 이질적인 거리감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한, 그리고 그것
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 하지 않는 한 그 낯설음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징검다리 같은
구실을 해주었다.
그동안 음악에서 금기처럼 여기던 소음과 불협화음, 고함과 외침 등이 새롭게 조합되면서
음악적 표현이 되고, 창의적인 음악적 상상력이 되는 등 창조적인 음악을 위한 효과적인
재료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낯설음이 파괴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
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기량 때문이다. 프리뮤직이 '아무렇게나 하는 연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아니고 음악적 개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무대에서 보여지는 그
들의 진지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비록 음악적 형식과 내용, 질서와 규칙을 철저하게
파괴하지만 그 과정에서 연주자간에, 그리고 청중들과의 끝없이 대화하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음악적 노력을 한 순간의 해프닝이나 일회성 이벤트로 삼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내는 일생의 과정으로 삼고 있음이 확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음악가가 새로운 음악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언어가 변하듯 음악도 사회구조나 생활양식이 변화하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
이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사를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은 작품 하나
하나에서 이전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면서 느끼는 삶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남과 다른 새
로운 것을 추구하는 작곡가 개인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음악가가 강한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고전과 낭만시대를 거치
며 형성된 불변의 기본적인 음악양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이 벗어난 부분만큼이 바
로 개성이 되는 것이다.
베토벤 이후 서양음악은 반음(#나 b)을 활용한 조성의 파괴, 음계구성의 기본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으뜸화음의 파괴를 거쳐 1920년대 쇤베르크에 이르러 조성마저 파괴하는 무조
음악의 시대, 더 나아가 존 케이지의 불확정성의 음악, 음열주의를 활용한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으로 까지 나아간다. 프리뮤직은 이런 음악적 성과들을 계승하고 있다. 프리뮤직
은 전위음악의 요소인 우연성과 불확정성, 재즈의 즉흥성을 결합한 가장 급진적인 현대
음악이어서 비록 낯설고 생경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음악이 아닌 어떤 것이라고 평가되
는 것은 옳지 않다.
이번 연주회의 주요 연주자들은 대부분 현대음악의 주 무대인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연주 당일에야 만나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무대에 올랐다. 말 그대로
즉흥연주였던 셈인데 바로 이 때문에 문제가 있기도 하였다. 사전에 주어진 주제에 대한
연주자들의 이해 폭이 달라 서로의 감정에 수긍하지 못해 음악적 소통을 이루는데 어려
움을 겪기도 했고, 또 서로에 대한 음악적 배려가 부족해 공감을 갖지 못하면서 음악적
합일을 이루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다만 공연도 있었다. 이러한 아쉬움이 프리뮤직의 한계
인 듯 하다. 이 과정을 보면서 규칙과 질서가 사라지고 무한한 자유가 허락된다 하더라도
자기를 고집하는 음악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는 사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인간 사회에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