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문화저널]
갈라거 도서관
남형두(2004-08-12 06:19:23)
필자의 미국 유학시절, 법대건물을 보고 두 가지 놀란 적이 있다. 8층짜리 건물의 정확히 절반이 도서관이라는 점과 그 도서관의 이름이 학교 설립자나 유명한 동문 또는 큰 공을 세운 교수가 아닌 법학도서관의 사서(librarian)였다는 점이다. 법학도서관에서 37년간 근무하면서, 도서관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마리안 굴드 갈라거”(Marian Gould Gallagher)의 이름을 따서 Gallagher 법학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두 가지 다른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하나는 하버드 법대에서 출간한 “The Bluebook”이라고 하는 법학논문 작성에 필요한 인용법에 대한 책이다. 35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법학논문을 작성함에 있어서 판례, 단행본, 논문, 신문, 인터넷자료, 외국문헌 등을 인용하는 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논문 작성시 인용법에 관한 표준안을 만든 것은 아니나, 미국 전역의 모든 법대에서 출간하는 법학논문집에서 이 규칙을 빌려 쓰고 있어, 사실상 논문인용법에 관한 통일법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둘은 거의 모든 법대에서 출간하는 “law review”라고 하는 학술잡지에 대한 것이다. 3년제인 law school에서 1학년이 끝날 때쯤이면 게시판에 law review 편집진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붙는다. 다른 많은 학회와 클럽활동이 있지만, 가장 성적이 우수하고 똑똑한 학생들이 모여 치열한 경쟁 끝에 선발하는 것이 law review 편집진이다. 그러기에 어느 법대의 law review 편집진 출신이라고 하면, 교수가 되거나 유명 로펌에 들어가기 위한 보증수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편집진이 되면, 1년에 3-4차례 발간되는 학술잡지에 실리는 약 10여 편 정도의 논문, 그러니까 1년으로 치면 약 30-40편 정도의 논문에 대하여 각각 할당을 받아, 자기가 맡은 논문에 대해서는 기고한 저자와 밀착 연결되어 저자가 본문(보통 주석이 100여개가 넘는 것은 보통이고 50페이지 남짓 논문에 주석이 3-400개인 것도 허다함)에서 인용한 문헌을 일일이 다 찾아서 대조하여 정확한 인용인지 여부를 검토하는 작업을 한다. 만약 부정확한 인용이나 표절이 있는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law review가 지기 때문에 대충 검토하는 일은 없다. 이와 같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야 하기 때문에, 편집진의 경우 편집활동에 대하여 학점을 부여하기도 한다.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로, 철도, 교량 등이 잘 닦여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을 산업기반시설 또는 산업의 infra라고 한다. 학문발전의 infra는 무엇일까? 물론 학문하는 연구자들(교수, 학생, 실무가)에게는 연구내용(본문)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용(주석)이 올바르게 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인용법이 학문에 있어서 infra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논문을 돌아보자. 여러 페이지를 넘겨봐도 주석이 하나, 둘 드문드문 있는 논문(그 하나, 둘 인용한 것 외에는 모두 자신의 idea란 말인가?), 본문 중에서 인용한 자료와 논문 말미에 정리한 참고문헌이 차이가 있는 논문 또는 본문 중에는 인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참고문헌 목록에는 거창하게 많은 외국문헌이 열거되어 있는 논문(참고문헌이 장서목록이라도 된단 말인가?), 같은 논문 중에서조차 통일되지 않는 인용법, 예컨대 “상게서, 전게서, 위의 책, 위의 글, 앞의 책”(베끼더라도 인용법만큼은 자기 식으로 하여야 하지 않을까?) 등등.
간혹 몇몇 유명한 대학의 교수들이 표절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속담은 지식정보화 시대에 있어서는 틀린 말이다. 책 도둑은 도둑도 보통 도둑이 아니라, 아주 비양심적인 도둑이다. 수많은 날을 밤새 고민하면서 좋은 논문을 작성하였는데, 어느 누가 이를 인용하면서 그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면, 특히 원저자보다 더 지명도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후학들은 그 생각이 표절자의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물건은 도난당하면 찾아올 수 있지만, 지식은 도난당하면 이미 유포되어 다시 되찾아 오기 힘들기 때문에 더 나쁘다. 우리 사회, 특히 학계의 발전이 있기 위해서 표절은 근절되어야 한다. 절대 관대해서는 안된다.
근대학문의 시작을 해방이후로 보더라도 이미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러나, 지금도 논문작성시 우리 자료보다는 일본과 미국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자료에 가짜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부차원에서(예를 들어 학술계를 주관하는 교육부와 저작권의 주무부서인 문화부가 공동으로) 이러한 논문인용법에 관한 표준시안을 만들 것을 여러 차례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지하세월이다. 차제에 품격 있는 문화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의 어느 대학이 이런 일에 나선다면 어떨까 싶다.
우리에게는 언제쯤 중앙도서관, 국립(도립)도서관 같은 메마른 이름이 아닌, librarian의 이름을 딴 멋진 도서관을 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