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6 | [문화칼럼]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립다
이병창 소설가(2003-04-07 13:48:14)
최근 발표된 통계청의 한 자료를 보면 지난 한해 우리 국민들은 한 사람당 평균 57병의 소주병을 비웠고 맥주는 81병, 그리고 잡지를 제외하고 독파한 책이 9권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 통계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았을 법한데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먼저 내 자신의 대차대조표를 공개하면, 내가 마셔댄 양에 비해서는 소주도 터무니없이 적었고 책도 부족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은 평균 이상이었던 셈이다. 책의 경우야 전공에 가까운 일이라서 스스로 발설하기가 아무래도 이물스럽고 넘살스런 일이라 곧바로 소주 항목(項目)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에누리없이 고백하자면 나는 이틀 걸러 소주 한병쯤을 마신다고 할 수 있다. 연간 180 병이 되는 셈이다. 국민 평균보다는 무려 세 배를 더 마셔 왔다. 그런데 우리 가족 전체를 따져보면, 가족이 셋이니까, 나는 가족 평균 몫 정도밖에 마시지 못한다는 계산서가 나온다. 아내와 아들은 소주를 입에도 대지 않으니까 말이다. 변명같지만, 대단한 '꾼'으로 비쳐졌던 나 자신은 기실 평균적인 애주가에 지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집안 전체로 보면 구성원이 셋일 경우 어느 가정에서나 누구 하난가는 나처럼 술을 마셔대야 국민 평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호주가들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전체가 아니라 서너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그렇다는 뜻이다.
술이란, 새삼 정의할 필요도 없는 바이지만 그 역할과 기능이 '해소(解消)'라는 부분에 있다. 맺힌 걸 풀어주고 응어리가 진 관계를 녹여줄 목적으로 태어나서 그 측면에서 유감없이 효용가치가 인정된 물질이 틀림없다. 이 기능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언급한다면 잔소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술 자체가 신격(神格)으로 우대받던 사실을 떠올리거나 함께 무리지어 생활하는 원숭이 무리에서 거의 습관적인 수준으로 술을 즐기는 녀석들이 발견된다는 학계의 보고서를 참고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술이 아니다. 술이 착하다거나 어질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음주 이전 상태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낌새가 이번 통계청 자료에 동시에 나타난다는 얘기다. 술의 양과 책의 권수를 나란히 배치한 통계청이나 언론사 편집자들의 의도를 내가 제대로 간파했는지는 몰라도 이번 자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까닭이나 그 행태가 정당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어쩐지 본래 술의 역할과 기능과는 상관없어 보인다는 심증이 자꾸 드는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런 얘기가 된다. 안주도 없이 음주하듯, 술을 그토록 마시는 이들이 정작 책은 안 읽었다고?... 책을 거의 읽지 않으면서 술은 또 그렇게 마신다?... 물론 이건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냥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차원에서 한담(閑談)이나 나누도록 하자.
몇해 전, 문인들이 모여 러시아를 다녀온 적이 있다. 러시아는 그 무렵 경제난이 심각해서 국민들이 여간 고통을 겪는 게 아니었다. 출국하기 전에 여행 정보라고 얻어 들은 내용 중에 비누 몇 통이나 스타킹 한두어 벌 챙겨가면 대우가 달라질 것이라는 충고가 무색하지 않게 그들 주부들은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몇 시간씩 가게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며 서 있기도 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광경을 대하면서 우리는 당연히 우쭐거리는 심정이 아주 없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긴 행렬이 놀랄만치 흐트러짐도 동요도 없는데 하나같이 그들 주부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책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시장에서만 보이던 게 아니고 지하철 풍경도 마찬가지였고 버스 안에서도 흔히 대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기도 했다. 그 어느 한 순간, 이해할지 모르겠다, 누가 누구에게 쏘아부치는 지 모를 욕설 한 토막이 섬광처럼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쌍것들!...'
지금 러시아는 또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때 거기서 한때 우리에게 익숙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참으로 보기 힘들어진 정경(情景)에 눈이 번쩍 뜨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건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이 아니다. 책 읽는 모습이야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어린 시절 오래 손때를 묻힌 완구를 커서 다시 발견하듯 했던 광경이란 바로 옆구리에 책을 끼고 걸어가는 그들 행인들의 초췌한 풍모(風貌)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가방이나 베낭의 대량 보급, 그리고 그들 산업의 호황에 힘입어 사람들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모습을 이제 쉽게 대할 수 없게 된 것일까?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우리나라 주부들 역시 젊은 학생들처럼 책을 몇 권씩 넣은 베낭을 어께에 짊어지고 다닐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좀체로 볼 수 없어진 풍경 가운데는 '불심 검문'이나 '소지품 검사'를 하던 장면도 그 하나여서 통계청에서조차 이 내막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핸가는 우리나라 문화부장관이 책을 읽자는 어깨띠를 걸치고 문학인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고 다닌 적이 있다. 그 결과 책을 사서 읽은 국민이 얼마나 더 늘었는지, 정부 스스로는 얼마나 더 많은 책을 팔아주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로되 해외 토픽에나 오름직한 그 소식을 접하며 나는 혼자 앉아서도 누가 볼세라 안절부절 못했었다. 문맹률(文盲率)이 세계에서 최고로 낮다고 자랑해왔던 나라의 장관이 국민들에게 책을 읽자고 외치면서 다닌다?
여기서 이런 삽화 하나가 그려진다. 한 친구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등장해서 그윽한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시간에 늦는 친구는 변명이 구차하면서도 많으리라. 이윽고 그가 나타나고 예상이 적중한다. 그는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지도 않은데 과연 그럴 만하다. 그나마 늦어진 시간에 대자면 책을 끼고는 헐레벌떡 달려오는데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또 정신없이 폭음을 하면서 우리나라 평균 음주량을 높이는데 이바지하리니!... 이게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왜 이렇게 각박해지고 말았는가?
지난 주에 나는 <E=MC²>이라는 책을 들고 다니다가 기어코 어느 술집에선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또 사야 했는데, 운 좋게 책을 줍는 행운은 없이 잃거나 선물할 일만 있다고 약 올라서 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참으로 그립게 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