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문화저널]
평화와 화해를 위한 ‘떼제의 노래’ - [어두운 밤에]
이종민(2004-08-12 06:17:22)
프랑스 떼제에서 엽서가 한 장 날아왔습니다. 물론 ‘소가 넘어간 이야기’의 ‘사슴을 닮은 소녀’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졸업 기념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 제자에게서 온 것입니다. 지난 번 음악편지를 제 홈페이지에서 보고 문득 생각이 났답니다.
떼제에 관한 사연은 없고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 자신의 여행에 관한 얘기만 있었습니다. 떼제의 음악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이 없습니다. 그녀가 구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역인가 봅니다. 보름 이상을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만 구하는 것을 아직 찾지는 못했답니다. 어쩌면 자신이 진정 무엇을 구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러운 마음을 그런 생각으로 달래봅니다.
며칠 전에는 또 박남준 시인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주도에서 올라와 거제도를 거쳐 이제 창원지역을 순례하고 있답니다. 그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뉘우치고 뉘우칩니다. 연일 땀으로 목욕을 하는 날입니다. 내가 지금 걷는 이 생명평화탁발순례의 길, 지치고 힘들기도 합니다만 그동안 나만을 위해 살아온 뉘우침의 길이라 생각하며 걷고 있습니다.” 고된 육신의 시련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가고 있는 가 봅니다.
많은 이들이 무엇인가를 찾아 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자족하지 않고 애쓰는 모습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내려올 거 뭐 헐라고 올라 가냐?” 산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며 계곡에 앉아 술만 축내던 이 지역 모 방송국의 유명한 두 게으름뱅이도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왔답니다. 천왕봉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도 엄두를 내지 못한 여행을, 차타고 노고단 오르는 것도 꺼려하던 그들이 쉰 넘은 주제를 모르고 감행을 한 것입니다.
친애하는 서울의 교수 친구는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미국 버클리대학으로 떠난 답니다. 교환교수로 사회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문학 전공자는 영문도 모르고, 동학이네 전통문화네, 헷갈리고 있는 동안 사회학자는 미국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어로.
실은 저도 여행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박남준 시인에게 부탁하여 한 보름간 순례에 동참할 계획을 꽤 구체적으로 진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전통문화’의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전주를 전통문화중심도시로 키워가자, 뭣도 모르면서 제안을 했다가 덜커덕 그 실무를 떠안게 된 것입니다.
운명인가? 아니 의지의 문제입니다. 일요일인데도 연구실에 나와 있는 저에게 성수산 계곡에서 발을 담근 채 친구들과 술을 나누고 계신 사부님께서 전화로 약 올리며 지적한대로 입니다. 용택이 형은 한 수 더 뜹니다. “너 왜 그렇게 사냐?”
세속에 연연하는 이런 모습을 경계하며 사부님은 제 시골집에 ‘화양모재’(華陽茅齋)라는 당호를 내린 바 있습니다. ‘화’는 제 고향 화산(華山) 지명에서 온 것이고, ‘양’은 산북수남(山北水南), 북으로 산이 있고 남으로 물이 흐르는 지형(예를 들어 한양, 밀양, 담양처럼)을 형용하는 말이랍니다. 제 고향 화산이 바로 그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중국의 ‘화양’이라는 곳에는 모군(茅君)이라는 신선이 살았답니다. 그러니 ‘모재’라 하면 모군과 같은 신선이 사는 곳, 그런 뜻이 됩니다.
뜻이 너무 거창하여 제 스스로는 ‘화산 양지바른 곳의 허름한 띄집’ 정도의 의미로 새기고 싶습니다만, 세간의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사부님 염려의 말씀만은 ‘없던 일로 해둘’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음악의 힘을 비러 현실을 잠시 괄호 치는 것. [떼제로부터의 노래](Songs from Taize)도 그렇게 해서 자주 찾게 된 앨범중의 하나입니다. 떼제에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그 공동체의 삶을 몸소 체험하지도 못한 채, 그 음악에만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떼제는 물론 다녀가셨겠지요?” 앞의 제자 물음에 뜨끔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속에서는 이런 볼멘소리가 욱, 솟아오릅니다. 꼭 가봐야 아나? 꼭 직접 체험해봐야 느낄 수 있나? 그렇다면 짐작의 효용은 뭐고, 상상력은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마 길 떠나지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 무질러봅니다. “날씨마저 이렇게 무더운데 뭐!”
이런 생각에 마음을 묶어 듣고 있는 곡이 바로 [어두운 밤에]입니다.
어두운 밤이면 우리는 서두릅니다.
생명의 물을 찾기 위해.
갈증보다 더 우리를 재촉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하면 처할수록 신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아니면 의존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어둠과 같은 장애물속에서 방황할 때면 진리의 빛을 더욱 간구하게 됩니다. 되지도 않은 세속적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에 취하지 말라는 경고 의미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무엇을 성취하겠노라 감히 자부하지 말라는 뜻도 함께 새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마음을 두는 것은 평화와 위안을 주는 곡의 명상적 분위기입니다. 지나치게 저돌적이며 공격적인 한국기독교와는 매우 다른 떼제공동체의 풍모를 잘 그려주고 있는 듯합니다. 요란스럽지 않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다양한 악기의 음향과 어우러진 사람의 목소리가 참으로 고즈넉한 화음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떼제공동체는 1940년 스위스 출신 로제 수사(Brother Roger)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세계2차대전의 참화 속에서 신뢰와 나눔, 화해를 실천할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작은 마을 떼제를 발견하고 정착하게 됩니다. 1949년 여섯 명의 수사들이 서약을 하면서 공동체가 본격 출발합니다. 이들은 독신생활로 영적, 물적인 것들을 함께 나누며, 고아와 전쟁포로 그리고 내전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며 평화와 화해를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현재 떼제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수사 9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기도와 노동이 이들의 주된 활동입니다. 이들은 무엇인가를 구하며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매주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그저 기쁘게 맞아주며, 그들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떼제의 노래는 기도입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믿음을 회복시켜줍니다.
떼제의 노래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이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성경의 시편에서 빈 노랫말도 단순하며 선율도 단아하기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감동적입니다. 진리가 그러하듯 아름다움 또한 단순 소박한 것인가 봅니다.
“너 왜 그렇게 사냐?” 김용택 시인의 질타가 다시 귀에 쟁쟁합니다. “너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사냐? 일요일에는 쉬고 너 좋아하는 산에도 가고 좋은 친구들과 술도 한잔 하고, 그렇게 살지 뭐 대단한 것 이루겠다고 연구실에 처박혀 낑낑대고 있냐?”
그가 자주 인용하는 한 어린이의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눈이 안 온다/ 여름이니까.” 시 전문입니다. 이런 어린이의 마음이면 이 무더위도 별 게 아닙니다. 여름은 덥다. 여름이니까.
이 노래 들으시며 이런 소박한 마음 되살리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름은 여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