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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엇박자로 만든 귀여운 신파 판타지, <아는 여자>
신귀백(2004-08-12 06:12:35)
아침밥을 함께 먹은 사이(!)도 아닐텐데 남녀가 아침 숲길을 산책한다? 판타지다. 애인이라 믿은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 그만 만나자’다. ‘아는 여자’라는 현재형 시제는 졸지에 ‘알던 여자’로 바뀌는 것이다. <실미도>의 독기를 빼고 당구장에서나 만나면 좋을 듯한 얼굴의 동치성(정재영)은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다가 하는 말이, “응, 그러지 뭐”,다. 이 빙충맞은 프로야구 2군 외야수는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는 원망도 못하고 이별을 삼진아웃처럼 받아들인다. 상심한 그에게 의사는 뇌종양이라는 시한부 삶까지 선고한다. 애인도 없는데, 내년도 없이 3개월이란다. 한참 지고 있는 9회말 투아웃에 투쓰리 풀카운트. 세월이라는 치료약도 없는 상황에서 막막해진 그는 단골 스탠드바에 가서 술을 먹고 뻗는다. 술집에는 라네즈 모델 아닌 헐렁한 옷의 수호천사 한이연(이나영)이 그를 지켜보는데. 예쁘고 늘씬한 여자, 거기다 사악함이란 전혀 없고 오버 안 하는 이런 여자가 순정도 지극하니 전형적인 멜로의 설정 아닌가. 천사표 바텐더 한이연은 이 불쌍한 남자를 업고 여관에 데려가 재운다. 계속 판타지다. 이 톰보이 아가씨는 깨어난 이 못난 남자와 통성명만 하고 여관을 나오는데, 그녀는 중학교 시절부터 같은 동네 살던 치성을 짝사랑해 왔단다. 감독은 이런 감정선들을 판타지가 아닌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이나영의 좍 빠진 몸매나 아름다운 피부를 자랑하지 않는다. 문제 야구선수인 강한 남자는 강도에게 돈을 건네는 조금은 덜 떨어진 캐릭터로, 예쁜 여자는 중성 스타일로 만들어 버리는 엇박자 작전을 쓰는 것이다. 이 번트 같은 변주는 10년 스토커를 징그럽게 느껴지지 않게 하고 시한부 사랑의 절실함을 귀여움으로 바꾼다. 띨띨한 남자가 고른 그 빨갛고 화려한 드레스도 어딘지 덜 어울리지 않는가. 다 여우 감독의 스퀴즈 플레이다. 엇박의 변주는 결국 감독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시대에 안 맞게끔 젊은 여인이 눈썹에 맞추어 거안제미(擧案齊眉)로 보약을 바치는 챙겨주는 스타일의 여자, 이건 선수들의 여자 선택의 뻔한 이데올로기 아니던가. 생각해 보라. 여자들이 꼭 근육질의 남자만을 사랑하지는 않는 것처럼 연애의 고수들은 화려하고 예쁜 여자만을 택하지는 않는다. 좀 덜렁거려도 착하고 적당히 예쁜 여자를 고르는 그대로다. 남자 중심 그것도 선수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한데도 장진은 코미디로 처리하며 비난을 용케 비켜간다. 아마 시대의 감수성과 아부하지 않는 점이 점수를 받나 보다. 사소한 디바이스도 허투로 놓치지 않는 잘 짜여진 단편소설 같은 이 영화는 야구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둑 이야기나 시한부 연애 이야기도 아니다. 야구 같은 주어진 룰을 버려야 사랑이 생긴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사랑은 도둑처럼 찾아온다는 얘기 같기도 하다. 라디오 방송에 글 보내는 순진녀와 혼자 있을 때 코피 흐르는 장면 같은 뻔뻔한 단골 신파를 늘어놓는 감독이 밉지 않고 그냥 귀엽긴 한데…… 이 신파 코미디 판타지는 섹스는커녕 남녀 주인공이 키스 한번 하지 않고 입담으로 때워나가기에는 좀 버겁다. 버거우니 연극에서나 통할 법한 은행강도 소동극을 삽입하는데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 이 유치함 속에서 감독은 사랑의 기술을 말하는 바, 결국 도둑의 한마디로 응축된다. 사랑? 사랑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여자를 만나 고궁을 걷고 바닷가를 뛰며 ‘나 잡아 봐라’ 하는 것은 시쳇말로 판타지다. 노랫말처럼 사랑이라는 그 감정의 물결은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안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을 못해 본 사람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메시지지만, ‘알던 여자’가 많은 선수에게는 간이 맞지 않는 영화다. 그러니 프로선수는 보지 마시고, 여자 만나 혈액형이나 취미 혹은 누구 아느냐고 묻는 아마추어, 노을 지는 바닷가에서도 여인과 입을 못 맞추는 사람, 볼넷으로 걸어나간 것처럼 선보고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사람, 또 싸이가 뭔지 도토리가 뭔지 모르시는 분만 보시라.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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