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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 | [문화저널]
나의 삶에서 음악이 주는 기쁨의 시간
변상길 /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계명대학교 동산의(2004-08-12 06:11:39)
누가 말하기를 음악은 약이라 했다.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어 감정을 한계 상황으로 이끌어 소진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베토벤의 ‘월광’ 피아노 소나타 3악장의 격렬한 선율은 갑자기 오는 치통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일이 있다. 18세기 카이저 링크 백작의 불면증 치료로 만든 요한 세바스찬의 ‘골드 베르크 변주곡’은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산업사회 이전 음악은 노동에 있어서 필수 요소였으며 음악은 육체의 피로를 풀어주고 작업의 능률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대 동양에서는 음악을 의미하는 ‘악(樂)’자에 풀 ‘초(草)’자를 덧대어 ‘약(藥)’자를 만들었다. 즉 ‘약은 풀에서 나온 음악’이라는 심오한 진리를 꿰뚫은 지혜를 보면서 음악은 우리 생활의 한 부분으로써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좋은 음악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일본에서 물에다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을 들려 준 후 현미경으로 물의 구조를 관찰해 보니 육각의 결정체가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시끄럽고 슬픈 노래를 들려 준 후 물의 결정체 구조는 전자와 같은 형태가 아니라 육각의 결정체가 파괴된 불규칙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보고의 책자를 읽어 보았다. 우리 주위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어서 좋은 결실과 결과를 보았다는 사례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온다. 물까지도 아름다운 선율을 받아들이는데 하물며 음악이 사람에게야……! 금년 1월 나는 예쁜 외손녀를 보게 되었다. 그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 태교에 좋다는 음악과 찬양곡을 들려주었다. 태어나서 갓난아기가 무언가 불편해 하며 울려고 할 때 태중에서 들었던 음악을 들려주면 안정을 찾으며, 잘 때에도 그 음악을 들려주면 평안하게 잠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요즘도 그 음악을 들려주면 무엇인가 듣는 듯한 모습 가운데 차분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끄럽고 슬픈 노래를 들려주었을 때는 아이에게서 이전과 다른 무언가 불편해 하는 표정을 보게 된다. 몇 년 전 선친께서 병환 중에 계실 때, 남성합창단의 성가 곡을 열심히 들려 드렸다. 병환 중에 조그마한 소리도 듣기를 싫어하시던 분이 그 음악에는 감동이 되셔서 계속 들려주기를 원하셨던 기억이 난다. 분명 좋은 음악(성가곡)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에서도 귀한 영향력을 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음악이 영혼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 이러한 반응을 보면서 음악이 우리 생활에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6.25전쟁의 포성이 막바지로 향할 즈음에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교실이 없어서 화판을 목에 걸고 달성공원 야외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때는 수업이라기보다 야외에 매일 놀러가는 기분이었다. 2~4학년 시절에는 교실이라는 것이 대구 전매청 담배 창고를 급조해서 만든 것으로 간이 칸막이만 친 교실이라 옆 교실에서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려 음악시간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도 옳게 가질 수 없었다.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풍금을 조그마한 소리로 치시면 조용조용히 따라하는 정도였다. 고학년이 되어 군인들이 철수하여 처음으로 교정에도 서보고 달리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수선하던 때라 음악시간에 배우는 것이 몇 가지 동요와 교가 등이었고 졸업 때 졸업가를 배웠을 정도였던 것 같다. 이 당시 우리들이 주로 불렀던 노래는 군가 일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일이 있었다. 학교(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음악적인 전인교육의 일환으로 대강당에 오디오 시설을 하여 전교생 누구나 점심시간에 듣게 하였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그저 가서 쉬면서 음악을 들었다. 이때 매일 음악에 대한 해설도 곁들여 가면서 음악에 대한 퀴즈를 내어 맞추는 사람에게 상도 주곤 했다. 처음에는 상을 탈 생각으로 열심히 듣고, 해설에 대한 메모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렇게 매일 음악을 듣고 메모하다보니 어느 날 저절로 나에게서 음악이라는 것이 매일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짧은 점심시간에 다 듣지 못한 것은 방과 후 시내 음악 감상실로 달려가 주인아저씨께 졸라서 전 악장을 다 듣곤 하였는데, 이때 공부한 것이 평생 음악에 대한 기초가 되었다. 대학을 마치고 바쁜 사회생활 가운데서도 늘 음악을 잊지 않고 가까이 하려고 했다. 개업을 하여서도 음악을 들으며 진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넓은 바다 한 가운데서 주위에 물은 많으나 정작 먹을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는 것 같이, 이 시대 범람하는 많은 음악 가운데 정말 우리들의 영혼과 마음에 심금을 울려 줄 수 있는 음악이 얼마나 될까 늘 생각하면서 우리 젊은 후배들도 좋은 음악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어느 날 남성합창단 지휘자(계명대학교 작곡과 김창재 교수)부부를 만나 대구 남성합창단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제 어언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처음 합창 연습을 하면서 괜히 만용을 부려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였으나 차츰 단원들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게 되었으며,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어느 순간인가 즐거운 가운데 오늘 배운 곡을 흥얼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입단 한지 며칠 되지 않아 교회 순회찬양을 가게 되었는데 아직 악보도 익히질 못한 상태에서 사양할까 하다가 부족한 상태에서 찬양을 드렸다. 지휘자 보랴 악보 보랴 정신이 없었지만 그때 내 마음 속에서 눈물이 배어날 정도의 잊지 못할 은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순회찬양을 드렸지만 그때의 깊었던 감동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남성합창단은 1984년 합창활동을 통하여 지역사회의 복음화, 기독문화 창달 및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창단 되었으나, 성가대 지휘자 또는 성가대원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교사, 의사, 사업가 및 일부 학생단원으로 70여 명이 초 교파적으로 구성된 합창단으로서, 단원 중에는 지역 음악계의 중진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으며, 많은 단원들이 해외 유학중에 있다. 창단 이래 20회의 정기연주회와 제156회 교회 순회찬양 및 많은 특별 연주회, 해외 초청 순회연주회도 가졌으며 국내외 권위 있는 합창경연대회에서도 다양한 수상경력이 있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합창단으로, 지금까지 헌안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분들에게 개안수술비 등을 지급하였고, 가정복지회 홍보 도우미로써 불우한 이웃에게까지 음악활동으로 그들을 돕고 있으며, 다양한 연령층과 여러 직종의 직업인들이 매주 화요일 저녁에 모여 연습을 하며, 어떠한 연주 환경에서도 40명 이상이 일사분란하게 모여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른다. 언젠가 CD제작을 위해 녹음할 때 토요일 오후부터 그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누구하나 꼼짝 않고 열심히 헌신하는 모습을 이 자리에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엇다. 지휘자 선생님도 단원들보다 더 열심이시며, 남성합창단이 이 지역에서 연주회를 할 때마다 언제나 객석이(유료)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차며, 연습 때나 연주회 때 언제나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친다. 나는 이런 합창단을 사랑하며, 단원이 된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합창 활동을 통하여 늘 생동감 있고 활기찬 생활과 아울러 다시 젊어지는 것 같은 생기의 순간을 느끼고 있으며, 나는 기력이 다하여 노래를 부를 수가 없을 때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 찬양 드리고, 합창단 단원으로 합창단을 섬겨 나갈 것이다. 오늘도 찬양으로 새벽을 맞이하였으며, 찬양을 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고, 찬양을 하며 늘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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