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문화시평]
차이형형색색전
이상조 /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교육과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2004-08-12 06:06:01)
전북 현대미술 다시 읽기- 형형색색, 그 태도의 차이
이상조 / 전북대 미술학과 교수
서울이 점점 공룡화 되어 가던 80년대, ‘도시는 선이다’ ‘도시는 신호다’라는 표어의 대형 현수막이 도심지 곳곳에 걸렸었다. 그때는 고도성장이 막 이루어져 생활이 점차 윤택해지고 여가활동이 대중화될 시기였다. 생활이 윤택해지면, 인간은 권리를 극대화하려는 욕구가 늘어난다. 더구나 대중교통의 이용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자가용 차량을 구입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유행처럼 늘어나는 자가용 차량으로 인해 도심의 교통이 혼잡해질 즈음 등장한 표어가 그것이었다. 그 당시는 ‘도시를 획일화시키는 발상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딱딱한 문구였지만 도심의 교통이 마비상태에 까지 이르고 하루에도 수 백 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현실에선 꼭 필요한 문구라 여겨진다.
요즈음 거의 매일 당하는 일이지만 운전을 하다 보면 방향지시 등을 켜지 않는 차량을 흔히 볼 수 있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알다시피 방향지시 등은 앞뒤 차량에게 자기 차의 운행방향을 예측할 수 있게 돕는 등으로 그 기능으로 볼 때 도심의 모든 차량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요긴한 등이다. 방향지시 등을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거나 방향을 바꾸면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다. 따라서 방향지시 등은 자기를 위해서건 남을 위해서건 반드시 켜고 볼 일이나, 그 간단한 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많다. 또한 이 방향지시 등의 필요성은 비단 자동차 문화에만 국한시킬 일이 아니다. 집단 이기주의가 만연한 지금,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방향지시 등의 사용이 절실히 요구된다.
‘차이形形色色’이란 다소 이색적인 제목의 전람회가 열렸다.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 전시장이 개관한 이후 처음으로 의욕을 갖고 기획한 ‘전북 현대미술 다시 읽기-01’ 라는 부제가 달린 전람회이다. 기획의 변이 현학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회에 숨겨져 있는 관점이 전북의 현대미술에 관한 자기성찰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기획될 ‘제2’ ‘제3’의 기획전과 더불어 전북미술의 방향을 제시할 자동차의 방향지시 등과 같은 역할을 스스로 맡아하기에 전북 미술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리라는 기대가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기획전은 자칫 기획의도와 상관없이 구설수에 휘말릴 요소를 지니고 있다.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와 참여하지 못한 작가들과의 차별성에 관한 문제가 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번 전시회에 참여하지 못한 작가들이 “참여한 작가들은 전북 현대미술의 대표 주자냐?” 라며 반발할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점은 기획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기획자가 우려하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물론 이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은 너나할 것 없이, 열성적으로 커다란 스케일의 작품을 출품하였다. 또한 출품작 모두가 원숙한 기량과 훌륭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필자 개인적 견해로는 당연히 그들을 전북 현대미술의 최첨단 대열에 자리매김 해도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가 전북현대미술의 현주소를 제대로 알고 그 발전을 모색하고자 기획한 것이기에 당장 자리매김함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 생각하여 필자 또한 그러한 입장 표명은 다음으로 미룬다.
전시회로 다시 돌아가, 이 전시회에서 전북의 작가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였는가 살펴보자. 또한 전북의 현대미술의 개념은 어떻게 정의하였는가도 살펴보자. 그러나 아쉽게도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정리는 없다. 어쩌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전북 현대미술 다시 읽기-01’이란 부제가 전시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기에 이 두 가지 개념에 관한 정리가 없다는 것이 위에 거론한 경우와 같은 시비거리 내지는 따끈한 전북의 현대미술을 원하는 이들에게 가십거리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전북의 작가란 인간을 지칭하는 의미로 전북에서 태어난 작가와 전북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를 모두 일컫는 큰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전북의 미술이라 함은 전북에서 생산되고 통용되는 미술을 의미하는 것이지 전북 사람이 하는 미술 전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즉, 현장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백남준을 한국의 작가라 말할 수 있으나 그의 작품을 한국의 또는 서울의 현대미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필자가 이렇게 미술의 현장성을 중요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전북 현대미술을 다시 읽으며 현재와 현재이전을 통해 미래를 위한 거시적 안목과 태도를 키워야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둘째, 지금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미술가들을 통해 이 지역의 정체성이 충분히 반영된 타 지역과 차별화 된 ‘새로운 미술의 탄생이 읽혀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놓여 있다손 치더라도, 또한 지역간의 갈등 구조를 없애고자하는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간 정체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삶의 패턴이 틀리면 사고의 색깔도 틀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현재이전을 통해 미래를 위한 거시적 안목과 태도란 과연 무엇일까? 현재와 현재이전 즉, 과거(현재도 엄격한 의미로 인식한 순간부터 과거이다)의 주체를 미술사적으로 미래와 동일선상에 두지 말고 차별화시켜야 되며 미래의 주체는 과거를 통해 창조의 본질에 관한 의미를 수용하는 안목과 태도를 키우는 일 모두를 일컫는다.
요즘처럼 성공의 척도를 부의 가치로 규정짓는 사회에서는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이 드물다. 또한 미술이 언제까지나 가난을 끼고 살아야하는 비현실적 삶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규정짓지 않는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동이나 서나 예술가의 덕목은 창조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모든 역경을 견디는 것이었다. 삶은 역시 기능이 아닌 태도이기 때문이다.
차이 형형색색전의 서문 ‘전북미술 그 가능성-차이와 다름의 미학 그 아름다움’을 통해 김선태 교수는 전북미술의 그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가늠하였다. 특히 전북미술의 긍정적 성과와 부정적 해악을 조리 있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미래의 주역인 전북지역 대학의 미대 졸업생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위한 의지 표명과 지역미술의 확립을 위한 태도의 변화를 촉구하였다. 필자는 많은 부분을 김교수의 의견에 동의하며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김교수의 지적 중에 미술대전에 출품하는 취미차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 관한 지적한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는 미술대전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재교육에 관한 문제점으로도 접근해야 한다. 미술교육기관에 있는 필자로서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사회교육원이나 개인화실에서 다년간 공부한 이들이 대학원에 입학하고자할 때 무척 곤궁에 빠진다. 그들이 제시한 포토폴리오에는 다량의 그러나 보통의 기량을 넘어선 수준의 구상작품 사진과 몇 가지 공모전에 입상한 상장이 들어있다. 그들과 면접을 해보면, 이제 원숙하게 사물을 옮길 수 있으니 대학원에서의 수업을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미술을 단순히 사물을 재현하는 기술이라고 인식하는 사회 일방의 태도가 원인이다. 그들에게 현대예술이 안고 있는 위기는 예술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며 예술과 반 예술 나아가 비예술과의 한계성을 설명하라고 주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사물을 재현하는 방법도 미술의 다양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설명하기도 힘들 경우가 있다. 미술이 다양하다는 것은 구상작가나 추상(?)작가나 실험(?)작가나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교육시키는 곳은 다양성이 없다. 이제 취미를 원하는 이들에게도 미술의 다양함을 접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제시하여 그들에게 예술작품은 의미내용을 지니고 감상자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 가는 기쁨을 누리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