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특집]
토박이말의 순정
이 병 초 : 1963년 전주에서 태어나 우석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시안』봄호(2004-08-12 06:04:38)
원고 청탁서를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써서 작품을 창작하는 이유가 뭔지 말해달라는 그 물음에 답할 만큼 나는 내가 쓰는 언어에 자신이 있는가, 전라도 또는 전주 토박이말에 최소한의 애착이라도 가지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떡하면 지방에서 왔다는 소리를 안 들을까, 어떡하면 촌놈소리를 면해 볼까 일부러 서울말을 골라먹고 살아온 처지이고 보면, 표준어를 써도 충분한데 굳이 사투리를 써서 작품을 창작했던 데는 어떤 깊은 속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우호적 질문에 충실히 답할 만한 푼수가 나는 애초부터 못 되는 것이다.
또한 표준어를 왜 써야 하는가를 고민해 보지 않은 것처럼 나는 왜 전주 토박이말이 빈번히 드러나는 작품을 창작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해본 적이 없다. 서울 학원가를 전전하던 때 나는 수업 시간에 사투리 좀 쓰지 말라는 지적을 여러 번 받았었다.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물론 어쩐지 전문가 냄새가 안 나니까 제발 지양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지적을 받았을 때만 잠깐 서울 냄새를 풍겼을 뿐 번번이 전주말로 되돌아가곤 했다. 내가 독한 사람이 못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듣는 사람을 의식을 할 때는 표준어를 쓰는데, 말이 빨라지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여지없이 전주말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울 사람 흉내 낼만큼의 표준어를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것이다. 좀 수월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 표준어를 쓴 것도 아니고 그 먹고 산다는 게 지겹도록 싫어서 사투리를 고집한 것도 아니다. 전주에도 서울에도 붙박히지 못하는 말과 말 사이를 기웃거리며, 이거 참 내 언어가 왜 이리 접촉방언처럼 되어가나 무릎에 꾸덕살 박히도록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명색이 글을 읽고 글을 가르치며 글을 쓴다는 자가 이런 고민도 없이 산다는 게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하나, 드러내놓고 창피한 일도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말을 하다보면, 글을 쓰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쏟아지는 전라도 토박이말이 어쩐지 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같이 가자.”는 말도 꼭 “같이 가자 잉?”하고 말 뒤를 올리는 버릇이라든가, 어떤 대목을 끌어갈 때 “긍게 말이다.”로 분위기의 앞뒤를 눌러놓고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분필이 딱 부러지는 어떤 설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 -이다 그말여.”로 마무리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또한 문자 언어로 표시할 수 없는 언어적 미감, 전주 토박이말만이 가지고 있는 은근한 분위기와 냄새도 어쩐지 나를 나답게 한다고 여긴 것 같다. 판소리어투의 사설문체로 유명한 채만식 선생의『태평천하』나, 충청도 사투리를 눅진하게 베어먹은 이문구 선생의『관촌수필』이나, 박경리 선생의『토지』, 윤흥길 선생의「장마」, 조정래 선생의『태백산맥』, 김용택 선생의「맑은날」등을 두루 섭렵해 보지도 않고, 곳곳의 사투리를 노골적으로 구사함으로써 그들은 어떤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나하는 제대로 된 글공부도 없이 이 글을 쓴다는 게 한참 잘못된 것임은 분명하나, 아무튼 내가 쓰는 토박이말은 일단 내겐 낯설지 않았다. 내게 낯설지 않기 때문에 남들도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게 맞지도 않는 언어를 몸에 안 맞는 옷처럼 입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일부러 촌놈임을 티내려고 전주 토박이말을 사용했던 적이 없는 만큼, 무의식적으로 내 작품에 쏟아지는 전라도 토박이말은 이제 내가 해명해야 할 숙제가 된다.
나는 사투리를 왜 작품의 곳곳에 새끼줄 또아리처럼 틀어놓은 것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이 답답한 사회 현실에 마땅한 대응책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번번이 사투리를 통해 과거로 도망치고 싶어서였는가. 평등 세상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의 그리움에 답할 만큼의 시대적 존재로서의 치열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피 묻은 몽당 빗자루나 옆에 차고 도깨비와 외약씨름을 걸었는가. 아니다, 그게 아닌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리움을 입에 담을 만큼의 그릇이 못 되는 사람이다. 내가 쓰는 토박이말은 사회나 역사 이런 것들과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내가 쓰는 토박이말의 정체는. 촌놈임을 일부러 티내고 싶지도 않았고, 한 시대의 지고지순한 뜻을 가지고 토박이말을 쓴 것도 아니라면 왜 작품 속에 머위무침처럼 토박이말을 버무려 놓았는가.
아마도 토박이말 속에 담긴 사람다움의 품성을 닮고 싶었던 것 같다. 표준어 속에도 사람다움의 품성은 있고 따뜻함도 그리움도 담겨 있다. 그런데 언어로서 역할이 토박이말과 표준어는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표준어로 “밥, 먹었니?”라고 인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교적 기능으로서의 인사일 뿐이다. 그러나 “밥, 먹었는가?”라고 인사하는 언어는 밥을 안 먹었으면 주겠다는 의도 배어 있거나, 같이 밥을 못 먹어서 미안하다는 의도가 배어 있다. 또한 문자언어로 표시되지 않는 토박이말 특유의 언어적 뉘앙스가, 언어 이전의 사람에 대한 사람으로서 따뜻한 관심이 고구마 삶는 솥에 설설 나는 김처럼 토박이말에는 풍부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김용택 선생의 절창「맑은 날」에는 처음과 끝에 할머니의 말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죽으면 내 간을 꺼내보거라, 내 간이 있는가 다 녹아부렸는가.”
간장이 다 녹아서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의 이승의 마지막 말은 작품을 읽는 나를 숙연하게 했다. 일제와 6ㆍ25와 보릿고개 등에서 겪었을 배고픔과 떼죽음, 서러움과 억울함과 소나무껍질같이 거친 그리움이 피 범벅되어 있다가, 시인 조운 선생의 말마따나 온갖 허울 다 털어내고 남은 이승의 마지막 말에 나는 목이 메었다. “살아야 한다, 삶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라고 나는 그때 다짐했었다. 위에 인용한 말을 표준어로 옮기면, ‘내가 죽으면 간을 꺼내보아라, 간이 있는지 녹아버렸는지’이다. 문장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는 전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받아들여서 독자의 내면에 와 닿는 정도는 다르다.
‘꺼내보거라, 있는가 녹아부렸는가’가 가지고 있는 말의 느낌은 민족의 수난사를 온몸으로 견디어온 한 자연인의 거룩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힘들고 어렵고 고달프고 기막히고 지긋지긋했을망정, 함부로 무시당하고 멸시받아왔을망정 그 고단한 여정을 끝끝내 견디어낸 개인의 역사가 끈끈한 토박이말 특유의 말맛을 바탕삼아 이 땅의 위대한 민중의 역사로 부활되었던 것이다. 이 토박이말 속에는 목숨을 천벌처럼 알고 살지는 않았을지라도 마지막까지 목숨 줄을 놓지 않는 자신에 대한 태도,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했던 삶의 태도, 한 평생 바짓가랭이를 딸딸 걷어 부치고 살았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순, 그 속에서도 이웃들과 함께 웃고 울고자했던 순박하디 순박한 사람다움의 태도와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쓰는 글에 위와 같은 정서가 묻어나리라는 것을 나는 아직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서울말에 충청도말에 전라도말까지 뒤섞인 접촉방언의 묘한 데 와 있다. 참말로 말도 안 되는 요상스런 곳에 내 언어는 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이 촌스럽다, 덜 떨어져 보인다, 티껍다 타박할지라도 나는 내 스스로 되찾을 토박이말의 순정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