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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 | [특집]
삶의 질곡과 생생함을 담고 있는 말
김저운 / 전북 부안 출생으로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85년 수필, 90년 소설(2004-08-12 06:03:45)
“내가 나한테 내 값 허능 거이 곧 사람이제. 머 누구보고 내 값 멕여 보쇼오 헌당가잉? 개 돼야지라면 몰라도. 근으로 달어 팔 것도 아니고.” “그것도 호강시런 소리요. 나는 이날 펭상에 누구한테 값이 되야 본 일이 없는 것맹이요 왜.” 벨일이네. 멋 헐라고 넘의 저울 눈금에다가 나를 달어이? 그거이 또 옥황상제 천평칭이라먼 혹 모르겄지만. 그놈도 다 지가 깎은 지 눈금으로 저울 달 거인디, 그 저울에 개버우먼 헛덕깨비고 그 저울에 무거우먼 금방석인가 머? 아 장에 가 바아. 금방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손에 산 물건도 돌아섰다가 다시 재 보먼 눈금이 틀려지는디? 하찮은 물건도 그러는디 사람값을 어뜨케 넘의 저울에다 매긴다냐아." 요거이 어따가 정 둔 놈을 뒀능게비구나. “나는 천지에 혼자요. 나 죽는대도 울어 줄 놈, 씨도 없소이.” “베락맞겄네에. 생떼 같은 자석 두고 먼 소리여 그게 시방. 자가 자다가 듣겄다.” “서러워서 그러요, 서러워서. 오늘따라 내가 복장이 탁 터져 불라고 그래서어. 내 속을 나나 알제 누가 알어 긍게.” “우리도 잣대 들고 비단 지고 장사 댕게 보지마는, 내 잣대로 내가 눈금 재서 띠여 준 비단도 같들 않당게로? 내 손도 틀리는디, 넘의 손에 왜 나를 재냥게 그러네이, 꼭.” “그건 다 딛기 존 소리고." “아이고오, 거그 조께 어드케 비집고 누워서 눈 좀 붙여보시오예.” 소설 「혼불」에서 옹구네와 황아장수의 대화 중 한 부분이다. 야반도주하다 쓰러진 강실이를 거멍굴 아낙 옹구네 이부자리에 눕혀 놓고, 두 아낙은 거침없이 말을 주고받는다. ‘상것’들의 거친 삶의 흔적과 냉소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똬리를 틀고 있다. 서사적 흐름을 방해하는 방대한 자료들 앞에서 숨막혀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혹적인 문체와 전라도 사투리의 빼어난 형상화였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는 경상도 사투리의 녹녹함을 맛보았다. 또 한참을 거슬러올라가면, 중?고등학교 시절 안수길의「북간도」같은 소설을 읽으며 북쪽 사람들의 사투리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재미를 붙였던 기억이 있다. 「배따라기」에서 남편과 아내가 싸우는 장면도 그 사투리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네게 상관이 무에가? 듣기 싫다.” “못난둥이. 아우가 그런 델 댕기는 건 말리지두 못하구!” “이년! 사나이에게 그따웃 말버릇 어디서 배완!” “에미네 때리는 건 어디서 배왔노! 못난둥이!” “정말 쥐가...... . 아이 죽갔다!” “이년! 너두 쥐? 죽어라.” “역시 쥐댔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그 속에 담긴 삶과 사람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고 과제를 품기도 하는데, 문장에 담긴 맛과 빛깔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강의 줄기가 서사라면, 굽이에 따라 깊이에 따라 다른 물살과 소리는 문장이라고 해야 할까? 오래 전에 딱 한 번 채팅을 해 본 적이 있다.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호기심으로 어찌어찌 해 보다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접속이 되었다. 그때 나는 나름대로의 문화사절로서 이 지역 소개를 한답시고 전라도 사투리로 써 내려갔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욕하지 말라며 훈계를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사투리가 욕이라니! 주고받는 내용도 그렇지만, 그렇게 무식한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시간 낭비다 싶어 그 후론 단 한 번도 채팅을 해 본 적 없다. 요즘 젊은이들은 인터넷 용어나 이모티콘을 즐겨 쓴다. 나이 탓인가? 내가 보기엔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라기보다 문자나 기호인 것 같다. 물론 문자나 기호도 소통이 되는 언어이긴 하지만, 아름다움이나 사유가 없이 산만하기 이를 데 없다. 기호에 익숙한 그들의 언어에는 사유와 철학이 부족한 듯하다. 툭 내뱉는 말 한 마디에도 삶의 의미와 빛깔이 묻어나거늘. 그런 면에서 볼 때 사투리는 얼마나 살아있는 언어인가? 그것은 문어(文語)의 도식과 나른함에서 벗어나, 삶의 질곡과 생생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구어(口語)이다. 내 삶의 텃밭에서 형성된 언어이다. ‘교육’되지 않고, 뛰어 놀면서 부딪히면서 어우러지면서 저절로 익힌 말이다. 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이웃과 친구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이다. 국어 선생인 나는 ‘서울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표준어를 가르치면서도 사투리를 무시하지 말라고 이른다. 사투리야말로 살아있는 언어이며 귀중한 문화유산임을 강조한다. “서울 사람들이라고 다 교양 있고 지방 사람들이라고 다 무식한 건 아니다. 서울말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단, 편의상 표준어를 그렇게 통일한 것이야. 만약 이곳 전주가 수도가 되면 어떻게 될까? 여그 말이 표준어가 되는 것이여. 안 그려?” 그러면 아이들은 큰 소리로 대답한다. “그려라우!” 이크! 이러다간 또 전주로 수도 이전, 아니, 천도하려는 터무니없는 수작 부린다고 트집잡힐라. 하긴,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그려도, ‘머 누구보고 내 값 멕여 보쇼오 헌당가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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