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특집]
“으서 외깄소?”
사회방언학자 김규남씨 따라나선 방언조사(2004-08-12 06:00:13)
방언은 그 지역의 구성원들이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어체계,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매체가 발전하고 생활패턴이 바뀌면서 각 지역에 따라 확연하던 방언의 특성도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방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다.
“20여 년 동안 방언조사 다녔었는데, 그동안 사라지거나 희미해진 방언이 참 많아요. ‘으서 외깄소?’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어디서 왔냐?’라는 뜻인데,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방언조사 나가면 이런 방언으로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생활방식이 바뀐 탓이 큰 것 같아요.”
장마가 끝나고 찜통더위가 막 시작되던 지난 7월 20일, 방언조사를 위해 길은 나선 사회방언학자 김규남(43)씨를 따라 보았다.
봉동읍을 지나 한참을 더 달리자, 본격적인 ‘시골길’이 나타난다. 아스팔트 길이 깔려 있긴 하지만, 지나다니는 자동차도 적고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긴장하기 시작해야 하는 때다. 그렇게 접어 든 곳이 완주군 비봉면 내월마을. 마을의 뒤와 옆에는 병풍을 쳐놓은 듯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으로는 작은 개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의 마을이다.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니, 40여 호 정도의 집이 들어서 있는 마을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흥덕사라는 절이 보이고 마을 한가운데에 창녕 조씨 비석도 서 있다. 마을을 드나들 수 있는 길이 하나 밖에 없어,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많이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역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마침, 마을 입구 커다란 나무아래에서 할머니 한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 할머니로부터 마을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얘기를 듣기로 했다. 연구자의 오랜 경험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할 때다. 방언조사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한 것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친근함과 신뢰감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자칫 무안을 당할 수도 있다.
“어머니, 버스 기다리세요?”라고 인사하며 친근하게 다가서자, 다행히 별 거부감 없이 술술 질문에 대답해 준다. 삼례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는 그 할머니로부터 이곳이 창녕조씨의 집성촌이라는 사실과 마을 이장댁을 확인했다. 이제 마을 이장을 찾아갈 차례. 마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마을 이장이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이 직접 조사대상자가 될 수도 있지만,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다른 분들을 추천받기도 쉽다.
하지만, 마을 이장도 조사대상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조사 대상자가 되기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대신, 마을의 내력을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는 할아버지 두 분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 두 분 모두 72살 동년배로 이곳 출신. 한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다시 이곳으로 내려왔고, 다른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니고 줄곧 살아온 토박이라는 설명이다. 주저 없이, 줄곧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조씨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조 할아버지가 이 지역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는 방언을 구사하는 ‘이상적인 화자’라는 판단에서였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할아버지는 그만큼 지역색이 희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 할아버지 집은 시원한 그늘을 뻗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댁에 계셨고, 저간의 사정 얘기를 들으시더니 흥쾌히 이야기를 들려주시겠다고 했다.
“그래, 뭐가 궁금한 것이여?”로 시작해, 연구자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시던 조 할아버지가 어느 순간부터는 실에 구슬 엮듯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가신다. 이제 서서히 연구자에게 친근감과 신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친근감과 신뢰감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대상자 말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조사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단 대화가 시작됐으면, 서서히 대화의 주도권을 대상자에게 넘겨주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도 꼭 필요하다.
“긍게, 그때 고생 많이 했제. 저기 금마 있는데랑 쑥고개로 막 나댕기고. 그라다봉께, 여기있던 사람들만 고생 많이 했제. 소 잡아다 잡아먹고. 저기 천금산, 대둔산 쪽으로 빨치산이 많았응께.”
조 할아버지가 태어난 일제시대 때로부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6.25 동란으로 넘어간다.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조사를 나온 김씨는 결국 목적은 할아버지가 해주는 마을의 내력이 아닌, 이곳 방언의 ‘음운’을 조사하는 것. 김씨는 IPA(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 국제음성표기문자)를 이용해, 부지런히 할아버지가 하는 말들을 표기해 나가고 있다.
집에서 직접 담근 시원한 매실차가 나오고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예전 농사 방법과 최근의 농사 근황에 까지 이르렀을 때, 이야기는 서서히 막바지에 이르렀다. 바쁜 농사철에 2시간 넘게 내주어 얘기를 들려주셨다. 김씨에 따르면, 경우에 따라서 3일간 동거동락하며 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김씨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장조사는 이것으로 끝났지만, 앞으로 할일은 더 많이 남았다. 현장 조사 때 녹음한 내용을 앞으로 열 번도 넘게 들으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방언연구라는 것은 그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다. 사라져가는 우리 방언을 어떻게 해서든지 체계적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사명감이나 책임감 같은 것이 없다면 도저히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이다.
“방언조사 활동한다고 20년 넘게 전북지역 시골길 곳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조사 활동을 하러 다니다가 시골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나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때면 정말 큰 보람도 느껴요. 하지만, 아마 시골 사람들이 갖고 있는 순박한 정의 혜택을 받는 세대는 제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김씨의 설명이다.
전주로 돌아오는 길, 긴 여름 해 덕분에 저녁 시간임이 무색한 무더위가 계속되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조 할아버지의 훈훈한 인심과 김씨의 말이 교차되는 아쉬움이 갈 길을 붙잡는다.
방언 조사를 위한 길을 나서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을 조사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명확한 목적과 목표가 세워지면 다음은 어느 지역으로 갈 것인지, 또 어떤 대상을 상대로 어떤 방법으로 조사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 방법을 정하게 된다.
이번에는 전북방언이라는 큰 범주에 속하면서도 지리적 요인에 따라 조금씩 다른 말의 장단이나 억양 등을 조사하는 ‘음운’ 연구를 위해 나선다. 때문에 정확한 조사를 위해 중요한 것은 방언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역과 조사대상을 선정하는 것이다. ‘음운’ 연구는 말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조사 방법은 당연히 대화에 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