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문화가 정보]
화가, 山寺에 가다
구혜경(2004-08-12 05:52:00)
아득한 백련향에 이끌려 굽이굽이 산자락을 돌아가니 저 멀리 가느다란 풍경소리 들리고 아늑하게 자리 잡은 山寺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김제 청하면에 있는 청하산 청운사. 절에 들어서는 진입로에서부터 뭔가 색다른 것이 보이는데 여기 백련지를 거치지 않으면 절에 들어갈 수 없는 관문처럼 앞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하얀 봉우리 삐죽삐죽 올라와 있는 백련지를 바라보며 오르는 길목은 그 시작에서부터 상큼하고 그윽하기 그지없다. 올해로 벌써 세 번째라는 ‘하소백련’ 축제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평생 이 별천지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담한 산사에서 벌어지는 축제는 요란스럽다기보다 백련이 피고 지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같이 즐겨보자는 듯 그렇게 소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백련이 피기 시작하는 6월 어느 날부터 이 곳에 화가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순한 호기심에 처음 이곳을 찾게 되었는데 그때는 축제 오픈행사가 끝난 뒤여서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고즈넉하여 몇몇 보살님과 스님을 제외하고는 오고가는 사람 없이 한적한 산사를 즐길 수 있었다. 행사하는 날 절에 가득 울려 퍼지는 재즈며, 대중가요가 나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곳 청운사에서 화가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설치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나로서도 흥미가 간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화가들이 산사로 찾아든 까닭인 게다. 백련지를 끼로 빨간 리본 주렁주렁 매달린 길을 따라 절로 들어서면 새로 건축한 듯 아직은 손때가 덜 묻은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실내에는 탱화가 하나 가득 놓여져 있고 주변으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깃발들도 나부끼고, 뒤로 돌아가니 벽면 가득 드로잉 된 작품이 가느다란 선을 따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뒷마당에는 높은 대나무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고 그 꼭데기에 빨간 새들이 바람에 풍경이라도 된 듯 움직인다. 얼핏 보기에 이런 것들이 다 뭔가 싶을 정도의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널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절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시야를 좁게 만드는 모양이다. 아무생각 없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뒷마당에 있는 오래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 위에 탑이 있고 또 법당이 있다.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편안함과 여유로움으로 한발 한발 절 주변을 다시 돌아볼 때 비로소 구석 구석 작가들이 만들어놓은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백련지 끝자락에 있는 정자 꼭데기에 아련히 보이는 것은 퍼포머 김석환씨가 ‘승천하는 용’을 표현한 것이었고, 그 옆을 끼고 도는 길목의 나무에 매달린 빨간 리본과 비닐에 담긴 드로잉들은 송상민씨의 축제에 맞는 설치작품이었다. 주위 깊게 보지 않으면 전혀 의식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느낌은 법당 처마 끝에 오색으로 매달린 새를 형상화한 이강식씨의 ‘바람새’ 작품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법당 뒷벽에 조각으로 드로잉 된 작품들은 황토벽에 담쟁이가 올라가는 듯이 검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고보연씨 작품으로 현장에서 마침 만나게 되어 절에서 전시하는 기분이 어떤지 물어보니 “절은 익숙한 곳이어서 낯설지는 않지만 작품전을 절에서 하고, 또 절의 주변 환경을 이용해서 하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색다르다”고 한다.
그렇다 화가들에게 전시하는 공간은 단지 장소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에서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고목에 작가가 만들어놓은 나뭇잎을 달고 돌계단까지 내려오는 광목천으로 물이 흐르는 듯한 생명을 불어넣은 정하영씨의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절과 한 몸처럼 보여진다. 또한 심홍재씨는 절 한쪽에 있는 큰 나무 밑에 마치 성황당 같은 느낌이지만 평소에 하던 ‘베게일기’를 꾸며놓았다. 소망이 가득 담긴 베게는 절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색채를 떠나야 만이 가능한 작품이었으리라.
작가들은 이렇듯 무관심하게 지나치면 전혀 의식할 수 없게 산사에 동화되어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 놓았다. 주변의 환경을 해치지 않고 그 자리에 꼭 맞는 자연스러움을 작가들은 곳곳에 만들어 새록새록 드러나게 하였다. 아마도 다음번에 다시 와서 절을 둘러본다면 편협한 눈으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습을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보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백련향 가득한 절에서 전시한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신선한 경험일 것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넘어 고스란히 작가들의 예술성만이 부각된 작품들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에 그 의미가 더할 것이다. 한 번은 더 그 곳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