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8 | [문화칼럼]
문명 전환기의 전통문화
최효준 /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서울대(2004-08-12 05:50:44)
지난 달 전국의 문화전문가들이 전주에 모여 문화중심도시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점검하고 전주 전통문화중심도시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자리를 가졌다. 다수의 지역주민들이 문화예술분야 전략화 정책을 바라고 있고 많은 전문가들이 전북을 문화로 발전할 수 있는 지역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꼽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극적인 건의가 정책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마련된 토론의 장이었기에 절실함이 더했으리라. 이 지역에 사는 우리 자신들이 문화도시 만들기에 확고한 비전과 의지를 가져야 함은 물론인데, 논의 구조의 틀을 단단히 하기 위해 몇 가지 짚어보려 한다.
먼저, 한 분과에서 논의가 뜨거웠다는 ‘전통문화’의 개념에 관한 문제다. 우리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의미 있게 확산된 지 대략 30여년이 지난 것으로 기억된다. 그간 경제사회문화적인 환경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해일과 같은 세계화의 흐름에 휩쓸려 민족, 국가, 지방의 고유문화는 급속하게 파괴되고 획일화되고 있다. 이 와중에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전통’에 기울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 것인지, 과연 가능한 것이지 한 번 근본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우리 것이라서 옛 것이라서 그저 좋은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해서 좋고 그래서 “지금 여기 우리에게 과연 좋다”는 의식이 다중 속에 퍼져야 원형의 전통이 제대로 보존되고 전승되어 오늘의 일상 속에 살아 숨쉴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민과 천착을 통해, 전통 가치에 대한 별 숙고 없이 내리는 ‘해당 사항 없음’이라는 중앙의 판단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연전에 개량한복을 거의 매일 즐겨 입는 외국인 직장동료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몸이 마른 이가 입으면 덜 말라보이고 살 찐 이가 입으면 덜 살쪄 보여서 아주 ‘기능적인’ 옷이기 때문이라 했다. 해외의 많은 건축전문가들이 한옥의 우수성을 실증적, 체계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웰빙’ 시대에 가장 건강한 식단으로서 한국의 전통 식단이 해외에서 각광받고 있다. 한지, 유기, 옹기, 천연 염색 등 끝이 없다. 서구에서는 동양을 문명사적 전환을 이룰 대안 문화의 보고로서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네들은 절박하고 절실하게 전환의 실마리를 바로 여기서 찾아내는데 정작 그 전통을 어렵게 지켜 온 ‘우리들’은 ‘고향의 예언자’를 제대로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전통문화의 중요한 측면인 자발적 소박성, 불편함의 편함 등을 받아들이느냐 여부는 결국은 가치관의 전환의 문제일 것이다. 소수의 의식 있는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에 이만큼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라고 할 때는 소수의 의식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다수 대중을 칭하지 않을 수 없다. 다수 대중의 호응이 없다면 폭압적인 경제와 자본의 논리 앞에 전통과 문화는 거센 바람 앞의 등불처럼 늘 위태로울 뿐일 테니까.
대형 공연장에서, 거리에서, 한옥 음식점 마당에서, 수시로 전통 예술 공연이 열린다. 그럴 때 해설이 곁들여지기도 하는데 소리의 사설을 국한 혼용으로 풀어 적은 인쇄물을 나누어준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친절한 배려를 통해 함께 가기, 깊이 들어가서 온전히 만나게 도와주기 등, 바로 내 옆에 늘 있던 것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과정이 치밀하게 인도되어 ‘확산’이 되어야 전통이 오늘의 일상 속에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명 전환에 대한 문명사적인 통찰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전통에 깊이 내재된 가치의 한 예로 자연에 대한 외경, 존숭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의식주,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서 중심가치는 자연과 자연스러움이었다. 그 극단적인 대척점에 자리해 있던 서양문화에 스스로 식상한 서구인들이 동양의, 한국의 전통에 깊이 심취하는 것은 바로 그 가치 때문일 것이다. 사티쉬 쿠마르는 자연에는 어떠한 낭비도 없으며 모든 것이 순화되고 재활용되고 변형되며 그것이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이며 반면 인간은 모든 것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고 심지어 자연의 경영자나 청지기조차 아니며 다만 자연의 친구다”라는 그의 말은 언뜻 급진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상적 본질이었던 우리의 전통을 생활화했던 선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사티쉬는 우리 안에서 자연의 영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심층생태학보다 더 나아간 ‘공경의 생태학’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상 속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경물사상을 생활화했던 우리의 선인들이 들었다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것이 오늘 여기에 어떻게 살려져야 하는 가에 대한 확신은, 문명 전환에 대한 역사적인 통찰과 전통의 사상적 본질에 대한 통찰로부터 촉발되어, 변화를 부를 인식과 행동의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역 범주의 문제이다. 토론장에서는 전통문화중심도시화가 주변지역문화의 블랙홀이 될 가능성에 대한 경계와, 또 다른 문화 패권주의가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기우라고 하더라도, 전주가 꽃이라면 지역은 뿌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중심 ‘도시’ 지정의 이슈이다 보니 전주가 그 대상이 되었겠지만, 적어도 전북지역 전체와의 유기적으로 연관성을 잃은 도시의 몇 지역(어렵게 보존되었고 한 편으로 끊임없이 변형되어가는), 몇 유적만을 내세워 전통문화의 보존 전승의 인프라를 구축하도록 지원하라는 논리는 좀 더 보강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과업 자체의 규모와 개념이 달라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전주는 자체로서 수미가 닫히는 전통문화중심도시가 아니라, 적어도 전북지역 전통, 역사, 문화, 예술의 기능적이며 상징적인 중심지로서 자리매김되어야 할 것이다. 호주의 한 주는 주 전체를 에코뮤지엄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전주가 전북지역 문화의 에코 센터, 발신지로서 기능하는 모델이 제시되었으면 한다. 그래야 전북지역의 명산, 명찰, 유적, 무형문화와 일상에 녹아든 그 모든 전통적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이것을 새로운 문명에 관한 비전으로 승화시키겠다는 명분을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근간 문명 전환에 관해 서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경제 쪽에서는 ‘지속가능성’이 화두가 되는데 ‘자연적 자본주의’, ‘생태경제학’, ‘상업의 생태학’ 등이 관심 끄는 책의 제목이자 곧 의제가 된다. 사회문화 쪽에서는 ‘동양(아시아)’. ‘여성(모성)’, ‘자연(생태)’ 등이 키 워드가 되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요즘 문화와 관광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관광 테마화를 위해서도 전통 문화를 문명 전환의 이슈와 연계시키면 좋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에코 투어리즘’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 문화라 할 때 그 범주를 도시 하나로 한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전략이 될 것 같다.
매일 모악산 기슭에서 일하게 된 것은 내게 행운이다. 전북권의 지리적 사상적 중심이라 할 이 산이 우리 역사, 우리 지역에서 갖는 의미를 곰곰이 새겨 보게 된다. 진훤의 미륵사상, 정여립의 평등사상, 강증산의 후천개벽사상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맥은, 그 옛날부터 상극이 아닌 상생을, 분열이 아닌 대동을, 파괴가 아닌 생명을 주창하는 비원으로 점철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기나긴 소외와 핍박의 역사를 접기 위해, 해원(解寃)의 큰 장 한 판을 거쳐 전북은 새로운 후천시대, 전환기 새 문명의 발신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간다는 마음으로 역사 인식의 전환, 전통 개념의 심화, 지역 범주 개념의 확장 등을 함께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