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 | [문화와사람]
단순하고 맑은 ‘풍경소리’를 듣다
-작곡가 지성호, 김영희 부부-
김선경(2004-08-09 11:24:49)
길이 그렇게 변해 있을 줄은 몰랐다. 구이면 항가리라면, 한때는 내 집처럼 드나들던 시절도 있었지 않은가? 그러나 새로 난 도로 위에서 나는 순식간에 길치가 돼버렸다. 몇 바퀴를 헤맨 끝에 가까스로 도착해보니, 풍경소리는 모악재 맞은편에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눈 씻고 봐도 그 자리였다. 다만 없던 도로가 두 개나 생겼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마을을 동강이낸 그 도로 때문에 항가리는 도무지 예전의 항가리가 아니었다. 예전이라면...그러니까 10년 저쪽의 일이다.
바로 그 10년 저쪽의 시절에,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다.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는 음악교수. 스스로 예술인과 교육자 사이에서 방황하기를 수 차례. 치열한 예술인으로 단련할 자리를 찾다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었다.
-그 전에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배낭이 5개였다. 틈만 나면 산을 찾았다. 나무와 흙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영감이 솟았다. 내게 땅 300평만 있으면...하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거짓말처럼 이곳에서 300평의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목돈이 없어 할부로 땅을 구입하고 손수 집을 설계해서 하나 둘 꾸려나갔다. 마당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잡풀을 뽑고 채소를 기르면서 그는 노동하는 예술가가 되어갔다. 지금은 항가리가 예술인 마을로 불리지만 그때만 해도 원주민들의 텃세가 심했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마을 방송을 통해 들려나오는 국적불명의 ‘뽕짝소리’는 참 견디기 힘들었다고.
-무차별적인 뽕짝의 공격을 견딜 수 없었다. 시내 음반가게에서 한국인이 제일 좋아한다는 비발디의 사계와 비엔나 소년합창단 CD를 사다가 동네이장에게 드렸다. 새벽에 소년합창단의 천사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에 부풀었는데 단 몇 초간 틀었을 뿐, 그 뒤로는 한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나를 보고 유휴열 선생이 두고두고 놀리는데 나는 워낙 그런 사람이다. 좀 고지식한 편이랄까.
그렇게 이 마을에서 12년 간을 살았다. 이제는 나름대로 질서가 잡혀서 외지사람이 들어와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다 자신이 길을 닦아놓은 덕이라고, 생색도 한번 내본다. 그런데 집 앞으로 4차선 도로가 뚫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아침저녁으로 사랑하던 구이저수지와 야트막한 산봉우리들이 만들어내던 아름다운 풍경은 지반을 돋워 만든 도로 때문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몇 날을 고민한 끝에 그는 도로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높이의 2층집을 올리기로 했다. 다시 설계부터 시작했다. 목재를 다듬고 깎아서 끼우고 흙을 개어 벽난로를 만들고 마룻장에 윤을 내는 노동의 날들이 지나갔다. 그리하여 1층집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양 자연스러운 2층집이 지어졌다. 저수지 쪽으로 창을 내자 사랑하는 풍경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구경온 지인들이 이곳을 찻집으로 하면 참 좋겠다는 의견을 내놨다. 찾아온 손님들 맞기도 번잡스러운데 무슨 찻집이냐고,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작곡하고 강의하기에도 바쁜 자신은 경영할 엄두를 못 내겠거니와 외부사람을 쓰는 일도 내키지 않았다. 고민을 해결해 준 건 아내였다. 신중한 아내는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고, 기명 하나 고르는 데서부터 완벽을 기한 아내는 정갈하고 단아한 찻집 주인으로 변신했다.
-서울 인사동을 다 뒤져도 맘에 드는 걸 못 찾아서 결국 화가 김충순에게 맡겨서 제작했다. 찻집이긴 하지만 우리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고 찾아온다. 갈 때마다 여일(如一)한 집, 항심(恒心)이 있는 집으로 자리하고 싶다. 아내는 새 그릇을 사도 바로 쓰지 않고 눈에 익어야 쓴다. 그리고 한번 눈에 익으면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풍경소리란 상호는 박남준 시인이 헌사한 것이다. 박시인이 항가리 외딴집에 살 때 우체부를 자청했을 정도로 둘의 인연은 깊고 단단하다. 시인에게는 독자라는 유형의 대상이 있다. 그들에 둘러싸여 있는 시인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도 든단다. 작곡가에겐 팬이 없다. 참으로 고독하고 노동강도가 센 직업이 작곡이다. 그러나 그 고독함, 그 힘겨움이 작곡을 밀고 가는 힘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재치가 예술인 것으로 착각한다. 예술은 기초가 중요하다. 예술은 얄팍한 책상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색을 통해 숙성되는 것이다. 인터넷처럼 즉물적인 것에 매몰되지 말고 고전을 많이 접해야 한다. 단단한 인문적 교양이 모든 예술인에게 필요하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희로애락에 대한 사색이 없이 어찌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가 대서사시 혼불의 작곡을 맡은 것도 인문학에 대한 깊은 탐구와 매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불에 대한 그의 경배는 최명희가 동아일보에 첫 회를 연재하던 때부터 시작됐다.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도 제일 먼저 구입했다. 그런 혼불이었으니 그가 만사 제치고 매달린 건 당연한 일. 그 덕에 전주시 예술상까지 수상하게 됐다. 그러나 대중들의 찬사와 물질적 상찬이 그는 오히려 낯설다.
-좋은 상추를 수확하려면 적당히 솎아줘야 하듯이 과감히 버림으로 해서 얻어낸 결과물이 작곡이다. 무대에 오르면 그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이다. 그 때부터는 연주자의 몫이다. 관중석에 앉아서 내 곡을 들으면 참으로 혹독했던 시간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저걸 정말 내가 썼나, 하는 아득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작곡은 학습을 통해 깨우쳐야 할 이론과 형식에 구애를 많이 받기 때문에 대중화가 어려운 장르다. 그는 교회의 풍금 반주자였던 고모에게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음악을 습득했다. 그의 삶을 통틀어서 소망은 언제나 하나,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취미이자 특기이자 생업으로 가진 참으로 행복한 사람.
-마음이 복잡하면 노동을 한다. 채소밭의 풀을 하나하나 뽑다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단순해진다. 씨를 뿌린 사람은 하느님을 만난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자연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신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다.
그는 보통 9시30분에 잠들어 새벽 두 시에 깬다. 그때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 두 시. 아무의 전화도 아무의 방문도 없는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 그러나 찻집을 겸하다 보니 단점도 생겼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지인들이 찻집이라는 ‘영업적 공간’ 때문에 예전처럼 자연스런 방문을 꺼려하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한 번 더 도약한다면 문고리에 수저 꽂고 집착 없이 살고 싶다. 다시는 길이 나지 않는 곳에서 소유를 줄이고 단순하게 살 것이다. 단순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진보다. 작곡도 마찬가지다. 교언영색으로 분칠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전할 때 아름답다.
그는 요즘 대작을 눈앞에 두고 두려움과 기대로 마음이 복잡하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예술적 열정 때문이지 세간의 반응이나 평가에 연연해서가 아니다.
-예술가가 기대야 할 곳은 당대가 아니라 영원성, 불후성이다. 가장 경계할 것은 생활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항가리. 10년 전 이곳은 밤 8시만 되면 인적이 멸하고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렸다. 지금은 그런 고즈넉함과 쓸쓸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부동산업자들만 들락거린다. 은둔과 몰두는 이제 이곳에서 무색해졌으나, 아직도 항가리에 예술적 향기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풍경소리 덕분일 것이다. 그 안에 작곡가 지성호, 김영희 부부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