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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7 | [특집]
만화, 그 서사와 과학과 진보의 아홉 번째 예술
주완수 / 1959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 학과와 한양대 미술교육 대학원을(2004-08-09 11:03:36)
사람들은 대개 만화를 무시하면서 너무 쉽게 자기화 한다. 어릴 때 부모님 몰래 만화가게를 드나들던 추억 하나만으로도 자기가 만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큰 무리는 없다. 어른이 되어 만화를 보지 않고 살아도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그래서 그 자기화는 고립되고 편협한 경우가 많다. 덕분에 만화는 문화의 변방에 내몰려져 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만화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불과 십여 년 전부터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 첨단 문화산업의 첨병으로까지 둔갑한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책방에 가서 유익하리라 여겨지는 만화를 사 주는 부모를 만나기는 아주 쉬운 세상이 된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나라에 개설된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는 대략 120개 정도에 이른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 학과의 경쟁률은 40대 1이 넘는다. 91년에 처음으로 공주전문대학에 만화학과가 개설된 지 불과 10여 년만의 일이다. 그 십 년 사이 미국과 일본의 하청 기지로 명맥을 이어가던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의 칸느’라 불리는 앙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오세암>으로 대상을 받았다. 2년 전 같은 영화제에서 <마리 이야기>가 같은 상을 받은 뒤 2년 만의 쾌거이다. 거품인 부분을 제외시키더라도 놀라운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도대체 이 변화는 어디서 어떻게 불어온 것일까. 의심 많고 권위적인 로마 교황청은 자기 종교를 선전하는 문화적 수단을 선택하는 데에도 인색하고 느렸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 들어 빠르고 다양하고 새롭게 변모하는 모든 문화 매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새로운 예술이나 매체를 사용해도 되는 지를 결정해 세계의 모든 교구에 넘겨줘야 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사용되던 시나 음악으로부터 새롭게 떠오르는 영화나 사진, TV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다가 아홉 번째로 추인한 것이 만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화를 제 9의 예술이라 부른다. 교황청의 아량이나 진보성 때문이 아니라면 만화가 로마 교황청이 거부할 수 없었던 어떤 힘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힘은 무엇일까. 쉽게 네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첫 번째가 만화의 서사성이다. 만화는 거침없이 수다스럽고,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고, 몰래 앞뒤에서 욕을 해대는 형식으로 민주적이다. 잘난 체하지도 않고 상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또 자기 이야기 사이에 독자나 상대의 상상력을 끼워 넣을 수 있는 형식적 배려 덕분에 독자는 쉽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칸이라는 이야기 형식을 만들어, 그 칸과 칸 사이에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를 만든다. 독자의 상상력이 다음 이야기를 이어준다. 영화가 일방적 이야기라면, 만화는 상대적이다. 이미 인터렉티브인 것이다. 이것을 스콧 맥클루드는 ‘홈통에 흐르는 피’라고 부른다) 이 서사성은 현대의 회화가 예술의 순수성이라는 슬로건과 권위 아래 너무 쉽게 포기한 부분이다. 그 결과 회화는 잠시 고상해졌지만, 영원히 ‘화랑이라는 무덤’에 갇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너무 바빠져서 수고스럽게 찾아다니지 않아도 편한하게 자기 대신 울어주고 웃어주는 예술을 택하게 되었고, 그것은 대중문화 여러 형태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만화는 처음부터 그렇게 출발했다. 두 번째가 만화의 과학성이다. 만화가 과학의 힘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근대 과학의 힘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여 자기화한 예술이 만화이다. 근대적 의미의 신문은 당대로는 최고의 첨단 과학이었던 인쇄술의 발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사진을 대량으로 인쇄할 수 없었다. 섬세하게 철필로 그린 일종의 동판화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 동판은 제작사간이 오래 걸려 시의성을 생명으로 하는 신문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오늘날의 만화이다. 만화는 대상을 표현하는 데 단순하고 과장된 선과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단숨에 동판화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최초의 주간 신문인 영국의 <펀치>지는 창간호에 왕이 되자 초기의 약속을 버리고 왕정복고를 단행한 필립왕을 풍자한 캐리커처를 실었다. 그림은 필립왕의 간략한 초상화가 서양배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서양배’의 발음이 ‘바보’와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이 그림은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서 그 후 몇 회에 걸쳐 반복 게재되었다. 이후 만화의 궤적은 매스 커뮤니케이션 관련 당대 첨단 과학의 안에서 그려진다. 영화가 만들어진 불과 몇 년 후에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컬러 출판물의 대중성 확보에 일익을 담당하고, 개인 컴퓨터에서 정보를 가공하거나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널리 쓰이고, 애니메이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3D 컴퓨터 그래픽 기술 수준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근에는 모바일에까지 가장 먼저 들어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런 맥락을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미래에 관해 보이는 것이 있다. 우리가 어떤 미래에 사용하게 될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어떤 형태로 진화해 있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마 만화가 그 안에 가장 먼저 들어가 지금보다 더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만화의 진보성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만화에 내재한 과학성을 추동하는 것이 만화가 생래적으로 지닌 진보성이다. 만화는 서구 유럽의 귀족사회가 근대적 의미의 시민사회로 넘어가기 위해 인적 물적 토대를 재편하려 했던 과정의 부산물이다. 만화는 도시 노동자와 결합해서 왕권과 귀족 사회에 대항하려 했던 자산가 계급의 매체였다가, 그 자산가 계급이 현실 권력을 획득했을 때 다시 그 새로운 권력에 저항해 야유를 보낸다.(그런 의미에서 만화는 이데올로기적이다. 이후 많은 만화가 자본주의, 개인주의, 군사독재와 제국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의 늪에 너무 쉽게 빠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출발부터 이미 이데올로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사적인 대중예술의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만화가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측면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한다) 또 이 진보성은 시민 사회를 넘어 대중 사회를 추동한다. 근대적 의미의 시민사회가 오늘의 대중사회로 넘어가려는 길목에서 첨병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만화이다. 영화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70년대 민음사라는 출판사가 시인총서를 발간하면서 웅변했던 말이 있다. “시는 우리 시대의 성감대를 이룬다” 지금은 아무도 오늘의 시가 그것을 해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 역할을 새롭게 맡은 것이 만화와 영화이다. 최근의 한국 사회로 영역을 축소시켜 보자면, 현 정권의 정치적 승리를 들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의 승리는 오래 전에 이미 현 정권이 정보의 민주화를 통해서 새롭게 형성된 문화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 있다. 노후보 주변 진보적 문화인사 중 많은 사람이 만화가였다. 이창동 장관 같은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가 있다. 노후보를 홍보하는 박재동의 TV애니메이션 속에서 노무현은 아름답고 따스한 달동네의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땀과 미소로 쓰레기를 치우는 이른 새벽의 미화원으로 그려졌다. 상대 진영의 홍보물 중에서 여기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조금 선언적으로 기대를 실어 거칠게 말하자면 2000년대의 이창동과 박재동은 7,80년대의 김지하와 황석영인 것이다. 네 번째가 만화의 예술성이다. 초기 만화의 많은 부분은 유럽 근대의 시대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풍자화 전통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멀리는 빌헤름 보쉬나 고야에서 가깝게는 도미에, 그로츠에 이르는 일련의 저항정신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감이 만화에 서사성과 혁명정신을 부여했다. 한마디로 근대의 만화는 근대의 조형 어법을 딛고 출발한 것이다. 이는 80년대 한국의 목판화 운동과 만화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만화는 여전히 조형적 완결성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 위의 네 가지 특질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다. 그 중 하나가 만화의 산업적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OSMU(One Source, Multi Use:하나의 산업적 성공이 다른 여러 영역으로 확대된다는 의미로, 출판 만화에서의 성공은 다른 연관 산업인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팬시, 테마 파크 산업 등으로 이어진다)이다. 이 글에서는 예술성에 초점을 맞춘 관계로 생략한다. 이 글은, 지면상 만화의 뼈대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 글을 읽은 그리운 내 고향 전주의 독자에게 만화를 다시 조금 천천히 둘러볼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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