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 | [문화저널]
화가의 산 이야기 6 -호남 정맥 이야기
이상조 / 전북대 미술학과 교수.산악인(2004-08-09 11:00:36)
지난 호 까지 알피니즘을 소개하여 산사람들의 영원한 화두, 왜 산을 오르는 가? 에 관하여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보았다. 그러나 순수 엘리트적 예술이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없듯이 알피니즘 또한 엘리트적 등반 방식이기에 대중적이지 않다. 단지 즐거움 속에서 건강을 위하고 쉽게 자연과 동화되길 원하여 산을 오르는 이들에겐 알피니즘은 너무 무겁다. 암벽등반도 레저 스포츠의 일종으로 남성은 물론 중, 노년층의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요즈음 이다. 하지만 알피니스트들의 등반기록이 자칫 무용담으로 여겨져 등산은 목숨을 잃는 위험한 놀이로 대중들에게 비춰질 수도 있다. 어느덧 가벼움이 수면의 맨 위로 떠오른 흐르는 세월 탓이다.
이제 우리 가까이서 쉽게 들 수 있는 산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지만 순수 예술의 지속적인 발전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듯, 알피니즘도 영원하였으면 싶다. 지금은 오르는 길을 막았지만 북한산에는 ‘깔딱고개’가 있다. 그 고개는 누구라도 코를 땅에 박고 헉헉대며 숨이 깔딱 깔딱 넘어가게 힘겹게 올라야 했다. 그러나 그 고개의 정상에 서면 갑자기 거대한 은회색 화강암의 ‘인수봉’이 코앞에 나타난다. 6, 70년대의 산악인들은 그 곳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말고 그 위용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리고 있는 젊은이를 유혹하였다. 꼭대기에 올라가자고. 따라나서는 젊은이는 대개 열에 일곱은 틀림없는 골수 산악인으로 빠진다. 알피니즘은 그렇게 자랐다. 지금은 ‘하루재’ 끝단, 인수산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그 깔딱고개를 대신하듯 쉽게 들 수 있는 산도 산인 까닭에 인간의 마음을 쉽게 빼앗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산줄기를 얼마 전까지 우리는 태백산맥 혹은 소백산맥하며 산맥으로 표현하여 왔다. 지금은 다시금 국정 교과서에 수록되었지만, 우리 고유 지리학에서 표현한 백두대간 혹은 호남정맥이라는 1대간 1정간 13정맥의 개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산맥으로 변한 것이다. 이 산맥의 개념은 일본의 지리학자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가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 14개월 간 우리나라 지질구조를 조사한 후 1903년 발표한 연구 자료가 기초가 된 것이다. 따라서 땅속의 지질구조선에 근거하여 땅위의 산들을 분류하였기에 산맥 선은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실제 지형에 일치하지 않는다. 반면에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냈다는 산경표(山經表)란 지리서에 나타난 1대간 1정간 13정맥은 산과 강을 하나의 유기적인 자연구조로 보았기에 산줄기는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고 실제 지형과 일치한다.
1980년 초 홀연히 인사동 고서점에서 발견된 산경표는 충격적이었다. 山自分水嶺-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이것이 산경표의 대 원칙이다. 잊고 있던 우리 고유의 지리학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산줄기를 밟는 운동이 80년 중반부터 산악인들 사이에 기세 좋게 일어났다. 백두대간을 따라 지리산에서 설악산을 지나 진부령까지 산마루를 이으며 걷는 팀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이제 백두대간은 몇몇 곳을 제외하곤 지도와 나침반이 없이도 종주가 가능할 만큼 넓은 길이 뚫려 있다. 백두대간을 전문으로 안내산행 하는 산악회도 열 손가락으론 헤아릴 수 없다. 어느 해인가는 대기업에서 수천 명의 사원을 동시에 백두대간의 구간구간을 걷게 한 기록도 있다. 황폐화되어 가는 백두대간을 보전하자는 운동이 일고 정맥을 따라 걷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혼자서 남한의 대간과 모든 정맥을 모두 밟은 산악인도 여럿 생겨났다. 왜일까? 산악인들은 왜 그렇게 산줄기를 잇는 것에 열광하는 걸까?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 의문을 풀고자 필자는 다음 호부터 호남 정맥을 따라 걷기로 계획을 세웠다.
1991년 8월 16일 필자가 속한 ‘겨울깊은’ 산악회의 백두대간 종주대가 7월1일 지리산 천왕봉을 떠난 후 종주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설악산을 한눈에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점봉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박달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단목령을 새벽에 출발한 우리는 여느 팀들과 마찬가지로 길 찾는데 엄청난 고생을 하며 가까스로 숲 속을 뚫고 나왔다. 자료조사를 하면서 익히 들었던 악명 높은, 독도가 어려운 구간이었다. 점봉산 오르는 길 초입까지는 길이 한갓지고 부드러웠다. 오르막길을 찾아 오르며 40여 일을 벼르고 걸어 온 길이기에 설악이 어서 보고 싶어 조급했다. 설악은 우리의 목표였다. 오대산부터 설악이 언듯언듯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기에 우리의 마음은 크게 들떠 있었다. 생각 같아선 한달음에 오르고 싶었지만 점봉산 오르막은 굉장한 인내와 줄기찬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그 오름 길은 남향이어서 한여름의 뙤약볕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온몸은 용광로처럼 끓었다. 얼굴은 소금이 엉켜 붙어 당겨져 뻣뻣했다. 등에 짊어진 배낭은 5일분의 식량이 비었는데도 불구하고 돌덩이를 멘 것처럼 무거웠다. 당연히 20대 힘 좋은 후배가 맨 앞에 서고 30대 후배가 그 뒤를, 40대인 필자는 마지막에 있었다. “많이 올랐다”하고 생각하는 중에 맨 앞의 후배가 고래고래 소릴 질러댔다. “자식! 다 올랐구나. 자 나도 힘내자” 헉헉대며 한발 한발 오르는데 두 번째 후배가 질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영문인가? 설악을 봐서 저러나? 두 후배의 괴성은 필자가 점봉의 정상을 오를 때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점봉의 정상은 정상에서야 비로써 정상인줄 안다. 경사가 급하기 때문이다. 정상에 선 순간 내 입에서도 탄성이 흘러 나왔다. 오른 쪽으로 설악이 왼쪽으로는 우리가 지나온 능선들이 장쾌하게 뻗어 있었다. 첩첩 산중이라 더니 정말이었다. 산. 산. 산. 또 산. 산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우린 너무나 작았다. 그렇지만 내가 내발로 저 길을 걸어왔다니... 눈물이 울컥 솟았다. 배낭을 벗고 웃통을 드러냈다. 등산화도 바지도 벗었다. 덩실덩실 춤이 추어졌다. 점봉의 정상에서 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괴성을 지르며 거의 나체로 춤을 추고 있었다. 한동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직도 해는 중천이었다. 우리는 점봉의 정상아래, 설악이 마주 보이는 샘터에다 잠자리를 마련했다. 설악은 서서히 어두움 속으로 묻히고 하늘엔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우린 내일 중으로 대청봉에 도착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일은 지원조를 만나 차디찬 맥주를 마실 판이었다. 이제 바쁠 것이 없었다.
호남정맥은 전북 진안 모래재 북쪽 600미터 지점의 주화산(656m)에서부터 전남 광양 백운산(1218m)까지 도상거리 398.7킬로미터의 산줄기로 ‘ㄴ’자 형태로 전라남북도를 가르고 흐른다. 백두대간 영취산(1076m)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까지 연결한다면 온전한 ‘ㄷ’자 형태를 이룬 462킬로미터의 산줄기이다. 크게 3번 솟구치는 호남정맥은 양끝과 한가운데를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차지하고 있다. 백두대간과의 분기점 부근의 장안산(1237m)은 호남정맥 산중 최고의 높이를 지녔고 한 가운데의 무등산(1187m)과 종착지인 백운산(1218m) 역시 높다. 이밖에도 호남정맥은 마이산, 만덕산, 오봉산, 내장산, 상왕봉, 추월산, 산성산,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봉화산, 존제산, 조계산 등 전라도의 명산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장수, 진안, 완주, 임실, 정읍, 순창(이상 전라북도) 장성, 담양, 곡성, 광주, 화순, 보성, 장흥, 승주, 구례, 광양(이상 전라남도) 의 16개 시 군을 지난다. 또한 호남정맥은 섬진강을 에두른 산줄기이다. 왼쪽은 항상 섬진강, 오른쪽은 구간에 따라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이 흐르고 있다.
그 정맥을 따라가며 우리를 키워낸 산과 강이 흘러가는 우리 땅의 모양새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