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 | [문화비평]
시간의 얼굴, 꽃의 속도
손 영 미(2004-08-09 10:26:32)
당 현종 때 궁궐인 대명궁의 아침을 그린 왕유(王維)의 시를 보면 [和賈舍人早朝 大明宮之作], 궁중에서는 닭을 기를 수 없었으므로 새벽이 되면 닭 벼슬처럼 붉은 두건을 쓴 위병(衛兵)이 밤에 시간을 재는 참대개비를 들고 와 조회(朝會)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닭은 없지만, 닭 같은 모습을 한 병사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궁궐은 아니지만 우리 집에도 아침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이 있다. 미모사, 사랑초, 블루벨 같은 화초들은 날이 설핏 기울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꽃/잎을 닫고 자신들만의 시간 속으로 숨어 버린다. 굳게 닫혔던 꽃의 문은 해가 뜨면 모두 열리고, 나는 아침마다 그 앞에 앉아 새로 태어난 시간의 향기를 맡는다. 꽃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만나 그 엄청난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공간에만 주의를 집중한다. 결혼해서 어느 도시에 자리를 잡고, 어떤 집을 사고, 그 방들을 무엇으로 채우고, 그 집과 직장 사이의 거리를 어떤 모양의 차로 오가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몇 푼 안 되는 차를 십년 넘게 타고 다니는 대신 음식이나 휴가, 책에 돈을 쓰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가진 돈의 대부분을 투자해서라도 멋진 외제차를 몰고 싶어 한다. 요컨대, 사람들은 공간의 차원에 많은 것을 쏟고, 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많은 경우 시간의 차원이다. 억대의 스포츠카를 타고 가면서도 목이 터져라 싸울 수 있고, 백만 원짜리 고물차에서 쇼팽을 들으며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 사소한 일로 핏대를 세우는 그 사람은 불과 몇 달 전 바로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눈물로 호소했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리고 지금 화가 치밀어 낯을 붉히는 그 여자가 5년 후,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될 것임은 짐작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부드러운 음악 속에서 상대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티코의 주인은 일년 전 신장 이식 수술을 통해 선물 받은 새 생명을 가능한 한 값지게 쓰고 싶어 한다.
시간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문화는 상당히 특이한 편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어휘가 “빨리빨리”라는데, 우리는 이 “빨리빨리” 때문에 제대로 한 번 살아보지도 못한 채 노년을 맞는다. 이 말 속에는 어서 빨리 이 초라한 현재를 벗어나 전 국민이 60-90평대 아파트에 살며 벤츠를 모는 눈부신 미래로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고생도 참고 견디고, 어떤 불법도 용인해야 한다는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나는가. 그 때 우리는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모든 지붕을 일제히 걷어 내고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파란색, 주홍색, 초록색 슬레이트 지붕을 깔았다.
여기저기 난 구멍으로 떡 접시와 칼국수가 오가던 생 울타리는 전부 베어 버리고 시멘트 담장을 세웠으며, 내친 김에 헌법까지 뜯어고쳤다. 국토 전체가 고속도로로 이리저리 연결되고, 모든 선남선녀가 그 길을 통해 서울로 가려고 발버둥쳤으며, 그게 안 되면 부천이나 성남에라도 남아 자식을 명문대에 넣어 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서 올라간 국민소득, 고층 아파트, 국제적 위상은 우리에게 이런 “빨리빨리” 정신만이 살 길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이 사라졌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애정과 신뢰, 현재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 미래에 대한 편안하고 여유 있는 믿음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바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에 있을진대, 우리는 습관적, 집단적으로 스스로의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를 걱정하고, 현재를 억누름으로써 우리 자신을 부평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 경제가 위기 아닌 적 있었나?” 라는 박승 한은 총재의 말마따나 (중앙일보, 2004년 6월 5일, 16면) 우리는 상시(常時)적인 위기의식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미래 또한 우리가 만들어 가는 아늑한 집이나, 반드시 실현될 아름다운 약속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자기 자식을 모두 잡아먹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누스 같은 존재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미래는 지금 누리는 젊음과 사랑을 앗아가고, 우리가 이룬 성취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무서운 악신(惡神)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의 근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에 형제자매와 재산,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을 빼앗기고, 새마을운동에 자유와 여유를 빼앗긴 근대화의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부정하고, 두려워하고, 낯설어하게 만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안정감과 연속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민족과 자신의 과거에서 위안과 자긍심, 행복의 기억을 찾고 그것을 되살리는 일일 텐데, 우리에게는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보면 일종의 병리 현상이다.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소외된 분열증 환자는 ‘현실과의 살아 있는 접촉의 부재’로 인해 지금의 삶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없고,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없다고 한다. (마키 유스케, 『시간의 비교사회학』, 소명출판, 2004, 167쪽). 눈부신 미래를 위해 과거나 현재를 경시하는 사람 역시 같은 함정에 빠질 것이다. “어떤 미래도 그 너머에 죽음을 [갖고 있고], 따라서 우리가 생활의 의미를 언제나 그 미래에 각인된 결과 속에서 찾는 한, 이러한 생의 총체는 갑자기 허무의 심연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같은 책, 192).
고대 마야인들은 시간의 흐름을 신들이 줄지어 서서 값진 선물을 지고 오는 것으로 파악했다. 예컨대 칸(Kan)의 날로 시작되는 달에는 옥수수가 풍작을 이루었고, 물록(Muluc)의 날로 시작되는 달은 비가 많아 작물이 풍성할 것이었다 (에릭 탐슨, 『마야의 흥망』, 오클라호마대 출판부, 1966년, 164쪽). 우리도 이런 식으로 시간을 그려볼 수는 없을까?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늘 쫓기고 초조해 하는 대신, 조금 다른 시각으로 그것들을 볼 수는 없을까? 시간이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 간다고 보는 대신, 갖가지 선물을 갖다 주는 여신, 우리가 지금 뿌린 꽃씨로부터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워 내고, 그 색채로 우리의 삶을 물들여 주는 존재로 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우리의 나날을 과거에 뿌린 종자가 탐스러운 결실을 맺어, 죽 당기면 주먹만한 감자들이 주르르 딸려 나오는 튼실한 줄기 같은 걸로 볼 수는 없을까? 시간 속에서 천천히 싹트고, 피어나고, 충실해지는 우리 각자의 속도가 존중받는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 순간 한 순간을 농익은 딸기처럼 음미하며 그 속에서 삶의 축복을 한껏 만끽하는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