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 | [문화와사람]
목판 위 세상엔 없는 것이 없다
목판화가 최완수씨(2004-08-09 10:24:13)
목판화는 다른 판화에 비해 작업 전 과정이 거의 작가의 손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른 판화들도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는 간접적인 표현방법으로 이루어지긴 하지만, 특히 작업과정의 수공성과 나무라는 재료의 성격상 목판화 작업은 더 힘든 과정임에 틀림없다.
다른 판화가 의도된 상태를 전제로 하여 밑그림을 정확하게 판에 그리고 종이에 옮기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목판화는 출발부터 혼자서 작업 전 과정을 진행해야 한다. 매우 주관적인 방법으로 ‘나무’라는 재료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판은 칼과 나무의 만남을 이해하는 작가의 매우 강한 직관과 이에 따른 판각 자체로 작품의 개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로 우리가 다른 판화에 비해 쉽게 목판을 대할 수 있는 장점임과 동시에, 고도의 숙련된 경험과 날카로운 감성을 동반해야 비로소 수작을 얻을 수 있는 목판화의 어려움이다.
봄과 여름의 경계선을 가르는 시원한 비의 뒤 안, 김제에 있는 최완수(43)씨의 작업실을 찾았다. 큰길까지 마중 나온 그와 함께 들어간 작업실엔 약속했던 녹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버려진 나무에 손맛을 불어 넣어 아주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한 찻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그는 22년 동안 오직 목판화 작업만 해온 장인이다.
그가 22년이라는 세월동안 목판화에만 매달렸다는 것은, 그동안 그가 다른 장르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21살, 처음 조각도를 잡고 목판과 대면하게 된 이후 목판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22년 동안 목판은 그의 유일한 애인이자 벗이었다. 그는 목판위에서 일하고 또 목판 작업을 하며 쉬었다. 말하자면 그의 삶의 희노애락은 모두 목판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목판 작업은 21살 때부터 시작했어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지 좋아했고 또 재주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엔가 서울 인사동에 갔다가 목판화 두 점을 보게 되었어요. 옛날 책을 찍던 목판화였는데, 그걸 보는 순간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 바로 저거구나’ 하는, 바로 저것이 내 운명인 것 같다는 느낌이 오더라구요. 그때부터 오직 목판화에만 매달렸어요.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고, 또 저한테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어요. 심지어는 먹고 자는 것 마저 그랬으니까요”
그렇게 그는 22년 동안 목판화 작업만 했다. 그가 지금까지 목판위에 새겨나간 글자는 일년에 적게는 1만자에서 많게는 3만자씩으로 하루에 최소 30자씩은 파 나갔다. 물론 목판 작업을 하면서 회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생각만큼 작업이 진행되지 않을 때의 예민함이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직 ‘손의 맛’을 익히기 위해서 그는 파고 또 팠다.
“지금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를 아무리 복원하려고 해도 왜 그 빛깔이 안나오는지 아세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에 만들었던 에밀레종은 또 왜 복원하지 못할까요? 그때보다 지금은 비교도 못할 만큼 과학 기술이 발달해서 온갖 기계장치들을 동원해도 분명 그것들을 따라가지는 못해요. 이유는 단 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손의 맛’이 그때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위대한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사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몇 십 년을 한결같이 하고 또 하고, 계속 그렇게 단순한 작업들을 해 나가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손에 어떤 감각이 생기는 거죠. 예전 장인들이 철저한 도제식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제자들에게 잘 안 알려줬다고 하는데요, 잘 알려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가 없었던 거에요. 왜냐면 그건 이론이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 스스로 그 감각을 느끼고 터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실제 필요한 기술 이론은 몇 개 없어요. 나무판 파는데 필요한 기술이 몇 개나 있겠어요”
하지만 몇 십 년을 하루같이 나무판에 글자 새기는 것만 하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터,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이 ‘머리의 부재’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또 이것저것 재다보면 절대로 손맛을 터득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오직 목판만을 생각하면서 파고 또 파다보면 굳이 어떤 생각을 하지 않아도 나머지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가장 적절한 때 모든 것을 알려주게 된다는 것이다.
“전 제 작품에 자신이 있어요. 20년 동안 작품에만 매달려 이제는 어느 지점을 통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칼의 숨소리를 느끼고 칼과 함께 호흡하는 이 지점을 통과하기 위해서 그동안 제 몸의 반은 내줬어요.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해가면서는 절대 다다를 수 없거든요. 한창 어려울 때는 밥을 못 먹어서 문지방 넘는 것이 힘든 것도 예삿일이었어요. 그런데 굶는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습디다”
이제 손이 자유로워진 그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모든 것을 털어내고 그 안에 새로운 것을 채워 넣는 일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 안에 채워 넣어야 할 것에 대한 고민, 자칫 껍데기만 있고 향기는 없는 작품이 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아무리 좋은 손재주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그 안에 담아내는 것이 변변하지 못하면 작품의 품격이 있을 수가 없어요. 작가의 인격이 그대로 작품에 투영되는 거죠. 그래서 지금까지는 머리를 비우고 오직 손에만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싶어요. 비웠던 머리를 다시 채우는 일이죠”
그의 작업장 한 켠, 커다란 책꽂이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책들이 그의 다짐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책이 『팔만대장경』이다. 제일 위쪽 정성스럽게 꽂혀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연 몇 십만 명의 조상들이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새겼던 『팔만대장경』이 그에게는 하나의 절대적인 경전이라는 것이다.
“전 솔직히 저거 봐도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 책은 저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한텐 큰 힘이 됐어요. ‘팔만대장경’을 새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어요. 아마 제가 했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저 책을 보면서 힘을 얻었구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그 결과물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거의대부분 박물관에 잘 모셔져 있는 반면, 그것을 피땀 흘려 만들었던 선조들에 대한 예우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죠. 그분들을 위해 제사 한번 지내는 일을 본적이 없으니까요”
“해인사에 가면, 그 절 스님께서 ‘팔만대장경’이 얼마나 잘 보존되고 있는지에 대해 자랑한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게 자랑거리가 됩니까. 책을 찍기 위해 만든 목판을 저렇게 보존만 하는 것이 어떻게 자랑이 되느냐는 말이에요. 저는 ‘팔만대장경’을 너무 많이 찍어서 이제는 글자가 희미해졌다는 말이 들어보고 싶어요”
작품을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져보고 탁본도 떠보기를 바란다. 힘들게 제작한 작품이 상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목판은 전시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한다고 하여도 다시 만들면 그 뿐이다.
현재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작품은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를 목판으로 제작해 내는 것이다. 몸이 많이 안 좋지만, 일은 생각날 때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하게 될지 모른다는 그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 같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그는 또 자신을 온전히 목판위에 바칠 것이며, 작품이 완성되는 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만지고 탁본해보기를 소망할 것이다. 작품이 다 닳아 더 이상 그림이 찍히지 않게 된다면, 그때 다시 새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