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 | [문화칼럼]
죽창 끝에 실린 백성부대의 ‘꿈 같은 한달’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서원대학교 교수 김정기(2004-06-12 12:22:53)
이 글은 지난 5월 11일 황토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개관식 날, 족히 6~7백석을 꽉 메운 노인들 앞에서 했던 기념사에다 그때 못다 했던 이야기를 덧붙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선한 소리꾼이 후회에 절어서 본선 때 빠뜨린 가사를 꿰맞춰 한번 읖조려 본 가락인 셈입니다. 그런데 4월 마지막 일요일이었던가요, 백산 봉기 110주년 기념식 때, 산꼭대기에 빈틈없이 들어앉힌 어린이들 앞에서 긴장하며 끙끙대던 내 모습이 어르신네들 앞에서는 당당해질 수 있었습니다. 역시 노인만세입니다. 이제 시작해 볼까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는 도무지 딴 청이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노인은
그래도 욕하거나 때리지 않는다.
피곤하고 고픈 소 역시
잡풀 더미에 코를 박아보지만
끝내 버티지만은 않았다.
이것이 사람이다. 소다. (5월 11일 「경향신문」)
여행 작가 유성문이란 분의 글입니다. 여기에 부지깽이 들고 뛰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곁들여졌더라면 정말 제격일 터. 심심산골에 계신 이처럼 소같이 순진하고 어수룩하신 할아버지 할머님들, 바로 이분들과 똑 같으신 우리 조부님들이 110년 전 죽창을 들고 떨쳐 일어나셨습니다. 그 넓디넓은 들판 여기저기에 피골이 상접한 시체가 저 세상에서 이 들판이 자기 땅인 듯 움켜쥐고 엎어져 있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백성들, 국가의 세금?지주의 소작료?부자의 고리채에 물려 뜯긴 백성들의 유일한 지옥 탈출은 ‘반란’ 밖에 없었습니다.
전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쳐들어가자.
고부를 두 번씩이나 함락시킨 백성군대는 1894년 4월 30일 드디어 백산에 모여들어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많게는 백성과 봉기군 합해 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20세기 초 부산 평양의 인구가 만에서 2만을 넘지 못했으니 대단한 숫자였습니다. 대장에 전봉준(1855-1895), 총사령에 손화중(1861-1895)?김개남(1853-1894)이 되고, 이른 바 4가지 목표를 만천하에 밝혔습니다. 그 핵심은 첫째 사람과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둘째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 셋째 서양 오랑캐와 왜놈을 몰아내자 이고 그 넷째는 병력을 휘몰아 서울로 들이쳐서 민비 친척을 쓸어내자는 것입니다.
이는 4개월 남짓 전, 사발통문에서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쳐들어가자”는 전봉준의 기본 전략이 마침내 백성의 동의를 얻은 것이지요. 고부-전주-서울로 연결되는 공격목표, 그러니까 읍 단위에서 도 단위로, 다시 도 단위에서 서울을 겨냥한 전국단위의 투쟁목표가 두근거리는 백성의 가슴에 붉게 각인 되었습니다. 무지렁이 백성이 졸병중심의 대오와 연합하여 지고 지엄한 대궐을 함락시켰던 12년 전 저 임오년의 함성이 산 속의 메아리처럼 백성의 뇌리에 울려 펴졌을 것입니다. ‘임오년’과 ‘갑오년’의 튼튼한 결합.
“저 널룬 논배미, 피 맺힌 낟알맹이 한나라도 맨칼없이 뺏기고 더는 못 살어, 싸가지 없는 놈덜. 자, 이녁들! 인자, 죽을 때 죽을망정 사람 노릇 지대로 한번 히 보고 죽드라고.”
백성군대는 배부르고 관군은 고프고
일기 불순한 5월 10일 저녁, 야습을 예견하고 흰 포목 허수아비로 관군을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매복 작전도 절묘하였거니와 이에 못지않았던 승인은 백성을 한없이 깔보는 관 특유의 우월 의식이 첫 승리의 제물이었습니다. 하늘처럼 높아 보이던 관의 군대를 쳐부수다니 늘 엎드려 사는 백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 꿈처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늘을 찌른 사기. 고픈 자에게는 밥을 주고 아픈 자에게는 약을 주며 또한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면서 행군하는 백성부대에게, 백성들의 정성스런 밥 광주리와 찬 둥우리가 줄섰는가 하면 살인과 강간 그리고 불태우기를 일삼던 관군의 주머니에서 재물이 쏟아졌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배고픈 기색이 역력했다고 합니다.(황 현『梧下記聞』)
자신감을 얻은 백성군대는 공격의 기수를 전주가 아닌 남쪽으로 틀었습니다. 조선의 정신적 수도―이 태조와 그의 사대조를 모신 곳―전주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더 더욱 넓고 깊은 민심의 확보와 함께, 군인?군비?군량?군기의 보강책인 군사력 증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백성군대의 장쾌한 군사퍼레이드
5월 11일 승리한 바로 그날, 고부의 황토재를 출발한 그들은 정읍-흥덕-고창-영광을 거쳐 22일 마침내 함평에 도착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계획해온 비장의 카드, 군사퍼레이드를 꺼냈습니다.
군대가 1만 여명이었다니 그 가족이나 구경꾼 백성들은 적어도 서 너 배가 되지 않았을까요. 행진의 선두에는 어른의 등에 업힌 어린이가―신동(神童)이라 불린 어린이―푸른색의 깃발로 전체를 지휘했다고 합니다. 인의?예지, 안민?창덕, 보제?중생의 큰 깃발 아래 형형색색의 고을이름을 새긴 기를 뒤따라 조총부대와 죽창부대의 퍼레이드가 보무도 당당하게 진행되었고, 또한 신동의 깃발 신호에 따라 걸으면서 휘어지고 꺾이면서 지(之)자와 구(口)자의 진세를 펼쳤다고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북?징?꽹과리와 날라리?피리 등으로 한껏 흥을 돋구는가하면 (『梧下記聞』) 모르면 몰라도, 넘치는 밥에 얼큰한 장국 그리고 떡판, 엿판에 막걸리가 빠질 리 없었겠지요. 함평벌에서 펼쳐진 이 장엄한 군사퍼레이드와 흔쾌한 ‘난장’의 결합은 조선의 개벽 이래 그 유래가 드문 ‘상놈백성의 역사적 한판 축제’였습니다. 해서 백성군대의 사기는 우주의 태극을 관통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럴 즈음 전라도에서는 관찰사로부터 아전?군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성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위축되었을 뿐 아니라 공문서에서 동학도적(東匪)이란 용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관이 민의 눈치를 보는 ‘이상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백성군대의 죽창 끝은 북쪽 전주로 향했습니다. 동시에 지도부는 백성들이 갈망하던 대원군(1820-1898)의 국가권력집행(奉太公監國 여기에서 태공은 대원군)을 천명하였습니다. 고종은 이름만 왕 대접하되 실제권력은 대원군이 쥐고 흔들었던 ‘임오군란’ 때의 일시 성공 경험을 환기시킨 것입니다.(뒤에 전봉준은 집권을 한 명이 아니라 몇 명의 어진 사람이 분점하여 합의로 행사하는 과두감국체제를 구상하게 됨)
대원군을 연호하는 함성이 들판을 가르면서 그 부대는 마침내 5월 31일 대망의 전주를 점령하게 됩니다. 백산 기포로부터 꼭 한 달 만에 이룬 쾌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죽창 앞에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본주의 일본군의 대포와 그 지휘를 받는 갑오개혁파 정부군의 기관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군바리 독재의 무자비한 공격에 직면할 저 5월의 광주시민군처럼 닥쳐올 어두운 예감에 두려워 떨면서 해방의 그날을 더욱 갈망했을지 모릅니다.
저는 이 한 달의 기간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상놈?상년의 인간화’를 집단적으로 실천한 백성최고의 날로 기억되리라 확신합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떠올린 몇 가지 단상
하나, 꼭 참석했어야 할 사람들, 아니 반드시 모셨어야 할 분들이 안보였습니다. 마침 남원 소재 연수원에서 ‘국회공부’를 마치고, 기념식 바로 그날 정읍에서 환경미화원을 격려하고 있었던 권영길 등 몇 분의 민주노동당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들입니다.
하나, 이창동 문화관광부장관의 기념사는 기존 판박이 그것을 조롱한 파격의 전형이었습니다. 차창 밖의 농촌풍경, 황토재 승리, 동학특별법, 탄핵으로 이어진 그의 깔끔한 즉석(?) 엮음은 영락없이 영화감독입니다. 그의 외도가 아깝습니다.
하나, 240여 억 원이 들었다는 기념관등은 외화내빈의 극치입니다. 110년 전 백성부대의 그 정신과도 너무나 동떨어졌습니다. 고집 면에서 관은 예나 지금이나 여일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