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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6 | [저널초점]
한옥마을 사람들
문화저널(2004-06-12 12:17:55)
<테마기획> ■“역사적 맥락에서 소프트웨어를 찾아야 한다” 장명수 전 우석대 총장 “1970년대 중반까지 한옥마을 바로 위에 전주 남원간 철도가 지나갔어요. 그때 전주 한옥마을이 전국적으로 아주 명물이었죠. 기차를 타고가다 한옥마을이 보이면 얼마나 신기 하겠어요.” 장명수 전 전북대?우석대 총장을 만나 <한옥마을>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는 서울대학교 건설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도시와 지역개발 전문가. 전주 <한옥마을>의 역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전주는 900여 호에 44,000여명 정도가 모여 사는 4대문의 성곽 도시였어요. 이 당시엔 현재 한옥마을이 있는 곳 거의 대부분이 뽕밭이었어요. 홍수가 나면 침수가 되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경기전 부근까지는 몇 가옥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집을 지을 생각을 안했죠.” 100여 전까지도 뽕밭이었던 교동과 풍남동 일원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기적을 이뤄낸 것은 일제의 식민지배 전략과 관계가 깊다. “한옥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말 부터에요. 당시 일본이 식민지배 전략으로 채택한 것이 경제적 종속이었거든요. 그래서 일본의 상인들이 대거 우리나라에 진출하는 동시에 의도적으로 중산층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이때 생성된 중산층들이 현재 교동과 풍남동 쪽에 하나둘씩 한옥을 지어 살기 시작한 거죠. 일본인들을 다가동에 왜식 건물을 지어 살았구요. 때문에 전주<한옥마을>의 한옥에는 기와를 얹는 방법이라던가, 유리문을 다는 등 왜식 건축기법이 조금씩 들어가 있어요. 전통적인 건축기법으로 한옥을 지으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짓는 것도 까다롭구요.” 1920년대 말부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대대적인 물자동원령을 내리는 1940년대 초까지 지어진 <한옥마을>은 그 위를 지나는 전주 남원간 철도에 의해 전국적인 명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 사회가 차츰 안정되고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한옥마을은 ‘보존지구’로 지정된다. 한옥마을이 보존지구로 지정된 것은 개발의 저지를 의미했다. 한옥마을에 단층 한옥 이외에는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집값은 떨어졌다. 거주 주민들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아파트로 떠났다. 이제 전주시가 직접 한옥마을을 보존하고 전주의 문화산업을 이끌어나갈 동량으로 키우겠다고 나섰다. 한옥을 증?개축하는 주민들에게는 지원이나 융자 등의 혜택을 약속하고 있고, 한편으로 전주시가 직접 한옥을 매입해서 문화관광 자원으로 만들 계획이다. 장명수 전 총장도 전주시의 <한옥마을>육성계획은 적극 환영했다. 이미 전주시가 작성한 ‘마스터 플랜’에 대해서도 ‘도시계획’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혀 손색없는 계획서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이 빠져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한옥마을>은 ‘한옥집의 군(群)’이라고 하는 물리적 개체를 말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문화적 주체는 아니에요. <한옥마을>이 몇 백 년을 이어져 내려 왔다면 그 자체가 ‘문화재’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또 그 안에 고유의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예를 들면 ‘민속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민속’이 들어가 있는 문화적 단위인데 반해, <한옥마을>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때문에 <한옥마을>은 계속 까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없는 양파와 같은 것이란 말이에요. 전주시의 육성계획 자체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매우 훌륭하지만, 문제는 외지인들에게 <한옥마을>이 무엇인가 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한옥마을>의 ‘역사적 맥락’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주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1950년대에는 전주가 영화생산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맥락’을 찾아가는 것과도 비슷한 과제였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오목대와 이목대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뿌리였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고려말엽 왜구를 무찌르고 나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에요.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인 묵조가 친구들과 놀다가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났을 때, 구렁이에게 잡아먹히기 위해 동굴에서 나오자 일시에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 묵조만이 살아남았다는 설화가 서려있는 곳 이구요. 이런 것들 다 용비어천가에 나와요. <한옥마을>이 문화적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조선왕조’의 뿌리와 관련되어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를 연계해, ‘조선왕조의 태동’이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 <한옥마을>을 넣는 것입니다.” 경주나 안동, 서울 북촌 한옥마을의 경우, 깊은 문화적 역사를 갖고 있다. 경주의 경우에는 그 문화가 조선시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년신라의 문화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이 문화관광산업의 메카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아이템을 갖고 승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갖고 있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것조차 놓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많은 시사를 준다. ■ “한옥마을은 문화재 아닌 삶의 공간” 전북대 채병선 교수 “주민들이 살지 않는 테마파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계획이어야 하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2001년 전주시가 교동 한옥마을을 새로운 문화관광특구로 지정하기 위한 본격적인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 전북대 채병선 교수(건축학부)는 이에 대한 연구조사를 토대로 마스터플랜을 준비했다. 주민들의 생활사를 토대로 한 구역별 분리 관리, 문화시설 거점 정비 등이 주요 목표였다. 그 후 3년여가 지난 지금, 한옥마을이 ‘주민’보다 관광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데 적지 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15년~20여년 후면 한옥마을을 관광형 테마파크화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주민들이 살지 못하죠. 한옥을 대상화하기 시작하면 실패한 정책이 되기 쉽습니다. 서울의 남산골 한옥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박제된 공간입니다. 한마디로 문화재죠. 그러나 전주의 한옥마을은 사람이 사는 주거공간이 돼야 하고, 삶의 방향으로 가치를 매겨야 합니다. 한옥을 기본적인 주거문화로 본다면 그 주인은 당연히 그 곳에 사는 사람입니다.” 채 교수는 도시한옥과 전통한옥은 기본적으로 정책적인 판단을 달리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주 한옥마을처럼 도시한옥으로 발전해 온 경우, 지금의 주민 생활 패턴에 맞춰 자유롭게 개선하고 바꿀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정 지원이 따라야 한다는 주장. 그렇게 행정 지원이 주민중심으로 전환될 때, 한옥마을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활력과 생기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옥마을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하나로 모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한옥마을은 우리가 가진 역사적 자산이면서 주민들의 실제 삶이 담겨지는 구체적인 생활공간이기도 하고, 도시공동화를 막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일관된 관점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학계와 주민, 행정이 원하는 한옥마을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점입니다. 주민들은 자산가치에, 행정은 관광과 산업에, 그리고 역사학자는 보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채 교수는 권역별 차등화 지원과 생활사전시관의 건립을 주장하고 있다. 가옥과 골목형태에 따라 보존이냐 개발이냐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그 결과에 맞춰 차등 지원하자는 것이 ‘권역별 차등화 지원’의 핵심이다. 이렇게 분리된 권역을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직접 나누어 관리하도록 힘을 길러주자는 것. 그것이 아담한 체험공간인 ‘생활사 전시관’으로 다양하게 자리 잡는다면, 보존과 생활 문화, 관광을 자연스럽게 구현해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문화시설은 현대적으로 지으면서 왜 주민들의 한옥은 손도 못 대게 합니까. 개보수에 대한 자유를 묶어놓는다면, 그건 삶과 라이프 스타일을 제약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담겨있지 않은 문화는 문화가 아닙니다. 한옥마을을 문화재로 만들자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든 주민들의 자신들의 삶과 생활 패턴에 맞춰 고치고 발전시키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채 교수는 무엇보다 한옥은 주민들의 주거문화인 만큼 ‘자유롭게 손대고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한옥마을 정책을 꾸리는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통문화 이미지만 있고, ‘공간’은 없다” 공공스튜디오 ‘심심’ 김병수 소장 지역의 구도심 정책과 도시 디자인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온 김병수 소장, 주거문화의 관점과 정책적 측면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데 한옥마을의 난맥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한옥마을은 ‘전통문화’와 ‘공간’의 개념을 동시에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산업적 ‘노림수’만이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통문화의 이미지나 유형의 모습은 정책적으로 소화가 되고 있는데, 도시형 한옥과 삶의 공간, 한옥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안정감 등은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고민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 혹은 두 부분을 단계적으로 밟아나갈 것인가의 문제 역시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옥마을을 구체적인 삶이 담기는 주거공간으로 보고 이를 정책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 특히 한옥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문화정책이나 이벤트에서 유리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현재로서 가장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전주 한옥마을은 1930년~1960년대까지의 건축적 특징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꾸릴 것인가, 또 그만한 보존가치가 있는가도 고민해야 합니다. 우선은 이 부분에 대한 판단과 선택의 문제가 고민되어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민들의 삶과 생활을 문화이벤트 속에 끌어들이는 부분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정책은 의미가 없습니다.” 김 소장은 “한옥은 이미 있는 공간에 정책이 개입해 들어갔기 때문에 마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주민들의 생활과 연관된 아기자기한 재미, 주변과의 소통이 한옥마을 정책을 짜는데 함께 결합되고 흘러들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개인이 할 수 없는 대규모 문화시설 중심으로 정책이 짜여지다 보니, 지금 개인 한옥도 이 같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주민들 자신도 자기 삶과 주거형태를 고려하지 않고 큰 자본을 갖고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주시가 새 판을 짜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 맞춰 한옥마을을 부각시키려고 나름대로 효율적인 정책을 끌어왔고, 전주시로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민들 보상 문제에만 만족할 게 아니라, 주민들이 그들 삶에 애착을 갖고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 소장은 주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노력들도 더불어 제시한다. “한옥마을에 상주하는 공무원을 두어 실질적인 고민이 가능토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집 하나하나가 가진 역사적인 내력을 파악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 정보를 토대로 문화 컨텐츠를 꾸릴 수 있기 때문이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생활 패턴에 맞게 한옥구조를 바꿀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민간자원을 개발해야 합니다. 전문성과 실천력을 가진 민간이 프로그램을 짜고 관광산업에 대한 성과들을 다양하게 모색하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적어도 10년을 내다보는 문화적 디자인과 계획, 그리고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이벤트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내는 노력들이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 노력이라고 덧붙인다. ■“해방 이후 주택가로는 일등급이었지” 삼백년가 수퍼 이규방 할아버지 무려 10대를 이어오며 교동 한옥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삼백년가 수퍼’ 이규방 할아버지 일가. ‘삼백년가’는 10대를 대물림하며 내려온 3백년 동안의 가족력이 고스란히 담겨진 이름으로 이규방 할아버지(70)가 직접 지었다. 여기에 ‘三百年家’라고 적은 독특한 간판 글씨는 이규방 할아버지의 형인 이주성(75) 할아버지의 ‘작품’이다. “1대가 몇 년이요? 30년이거든. 그래서 10대가 살아온 세월을 합쳐 3백년이라는 거야. 사람들이 이름 잘 지었다고 하더라고.” “사람들이 생각 없이 영문이나 영어를 마구잡이로 써댄다”면서 ‘문화저널’ 이름을 놓고 한참을 꾸짖는 이 할아버지. 한옥마을에 붙여진 골목이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적지 않다. “우리집 앞길에 붙여놓은 이름이 은행나무길이거든. 그런데 은행나무 길은 저 밑에 사거리까지란 말이지. 여기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 앞길을 ‘동촌길’이라고 불러. 그런데 그런 건 조사도 없이 대충 기분나는 대로 붙여놓고 뭐라고 이야기 하면, 옛날 얘기만 하고 있다고 하잖아.” ‘동촌길’은 일제시대 이전에 행세깨나 하던 부호들이 이곳에 모여 살면서 전주 4대문 가운데 동문쪽에 위치한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은행나무 길’이 아닌, ‘동촌길’로 부른다고. 이 할아버지는 교동이 이곳에 애정을 갖고 사는 사람보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들어온 ‘뜨네기’들이 더 많다며 그것부터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애향심’을 가진 교동 토박이들이 아니거든. 마치 토박이들이 들어와 사는양 선전을 하는데, 대부분 상업적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야. 원래 주인들은 다 아파트 들어가 살고 대부분 이 집들은 세를 주거든. 전부 객지 사람들이니 교동을 아낄 마음이 없는 거지.” 이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높여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주민들의 안목과 애정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는데 소홀한 행정 또한 문제라고 꼬집는다. “맨 가난한 사람들만 사니까 사상도 없고 보는 것도 가난하단 말이야. 그래서 자격지심이 생기고, 상관하기가 싫어지는 거야. 앞으로 한옥마을이 어떻게 발전했으면 좋겠냐고 묻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기관장이 바뀌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왕이면 50년, 100년을 내다보면서 멀리 생각했으면 좋겠어. 문짝 고치면 얼마 지원하고, 지붕 고치면 얼마 지원하고 지금 그 일만 하고 있잖아.” 이 할아버지는 한옥마을 정책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으면서도, 대부분 교동 토박이들이 여론을 주도하기 어려운 노년층인데다 일방적인 행정절차에 대한 불만이 뒤섞여 공공연히 ‘피해의식’이나 불신을 드러내고는 했다. “이사? 그런 건 생각 못하지. 우리는 의무적으로 여기 살아야 돼. 나 죽기 전에 현대식으로 다 고쳐서 우리 아들이 여기 와서 살게 해야지. 조상들이 다 여기서 사셨는데... 솔직히 여기 살고 싶어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 해방 후만 해도 여기가 주택가로는 일등급이었는데 말이야.” 형인 이주성 할아버지는 이곳에 뿌리 내리고 사는 것을 ‘의무’라고 말하면서도 ‘품위 있던’ 교동이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상업지구로 변해가는 것을 적잖이 아쉬워했다. 그래서 더더욱 한옥마을 발전 정책이 ‘본격적’이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시늉만 내서는 안 돼. 그래도 김완주 시장이 많이 노력하긴 하는데... 하려면 본격적으로 해야지. 전주시가 다 사들여서 싹 고쳐야 해.” 한옥마을을 ‘관광형 테마공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다소의 이율배반이 비쳐지기도 한다. “요 앞에 오목대가 있잖아. 거기 나무들이 다 크니까 전주시가 한 눈에 안 보인다는거야. 그래서 그걸 다 베고 작은 나무들을 심는다고 하더구만. 오목대 올라가는 상수리나무는 초근목피하던 시절에 다 우리 추억이 배어있는 곳인데, 함부로 잘라내면 되겠어?" 이규방 할아버지는 “늙은이들이 하는 잔소리가 뭐가 먹히겠느냐”며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회의를 자주 드러냈다.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옥마을을 어떻게 가꿔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행정과 주민들 사이의 합의나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 행정 결정에 있어 주민들에 대한 절차상의 배려가 부족하다는 점을 고스란히 시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드는 동네를 희망하며 교동 ‘재현 양복점’ 전호규씨 “1980년대 만해도 지금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사람들 많이 살았어요. 젊은 사람들도 많았구요. 그런데 1988년 올림픽 이후 기린로 내면서 한옥이 많이 헐리고, 사람들이 많이 떠났죠. 젊은 사람들은 아파트로 많이 가버리구요.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안 살죠. 특히 젊은 사람들 보긴 정말 힘들구요.” 전호규(63)씨의 회상이다. 그는 교동의 남천교 사거리에서 28년간 ‘재현양복점’을 운영중이다. 거의 30년에 이르는 세월을 한자리에서 일하고 생활해온 그는 한옥마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주변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중요한 양복점의 특성상, 인구의 유동과 그에 따른 상권 변화는 그에게 목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싸다고 가끔 이곳에 가게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 몇 달을 못 버티고 그만 두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한옥마을이 교통도 편리하고, 공기도 좋고, 시장도 가까이 있어서 생활하기에는 참 편리한데 ‘상권’은 안 되거든요. 사람들이 있어야 장사를 하죠.” 다행히 전씨의 ‘재현양복점’같이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켜 단골도 있고, 제법 소문도 난 집은 그나마 손님이 있다고 한다. “그 전부터 한옥마을에 대한 얘기들은 많이 오갔죠. 한옥마을 보존지구를 해체해야 한다 뭐한다 하면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정작 눈에 띄는 정책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여기저기 새 건물이나 문화시설 같은 것들이 들어서는 것 보니까 뭔가 좀 하려나 보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씨도 태조로 주변에 들어선 공예품전시관이나 술 박물관, 한옥생활 체험관 등이나 현재 짓고 있는 우석대 한방문화센터를 보면서 한옥마을에 번져가고 있는 미세한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작 주문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여기에 한옥 몇 채 세워봐야 뭐합니까.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나 와서 보고 좋아하지,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정작 돌아오는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일단은 이곳에 사람들이 좀 많이 와서 살아야 발전도 되는 것 아니겠어요. 차라리 사람들 많이 살 때 보존지구 해제해서 개발을 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사람 다 떠나고 개발한다고 하면 늙은 사람들이 뭘 알겠어요.” <한옥마을>에 먼저 사람들이 모여들고 활성화가 되어야 문화광관지로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옥 생활’의 가치와 문화생활을 누리기 쉽다는 장점 때문에 <한옥마을>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고 한다. 보존지구로 선정된 이후 발이 묶였던 <한옥마을>은 이제 지난 30년간 방치되었던 것에 대한 보상만을 남겨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로정비로 상권 활기 되찾아야 한다” 반세기 역사의 중국집 ‘교동집’ 손종만 사장 “기린로가 생기기 전에는 지금 이 앞에 있는 은행나무길이 남원 가는 국도였어요. 당시에는 정말 큰 도로였었죠. 사람들도 많았고요. 지금은 그때보다 인구가 3분의 1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전주에 아파트 붐이 일면서 많이 빠져나갔거든요.” 재현양복점과 ‘은행나무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 백년의 전통을 가진 ‘교동집’이 있다. 국수집과 쌀집부터 이어져 온 내력을 합하자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지만, 현재 그 내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단지 70년 전부터 상가로 허가받았다는 문서상의 사실이 ‘교동집’의 역사를 가늠케 해줄 뿐이다. 손씨가 ‘교동집’을 운영하게 된 것은 17년 전부터다. 송대섭 할아버지가 30여 년 동안 해온 자리를 이어 받은 것이다. 송대섭 할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됐지만, 여전히 그때의 교동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는다. “가끔 환갑도 넘게 나이 드신 분들이 찾아와요. ‘아직도 교동집이 있네’하면서요. 학교 다닐 때 성적 잘 받아오는 날엔 꼭 여기 와서 자장면 한 그릇씩 얻어먹던 기억들을 많이 얘기 하시더라구요. 환갑 넘으신 분들이 학생 때 여기서 자장면 먹었다면 여기가 얼마나 오래됐단 말이겠어요. 얼마 전엔 그런 추억을 갖고 계신 분 덕분에 ‘6시 내고향’에도 나왔어요.” 지금도 이곳은 지나가는 손님보다는 오래된 단골들이 많다. 혼잡한 시간을 피해 찾아간 이른 오전 시간, 찾아 온 손님 모두 그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인 듯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오랜 전통과 맛, 손님들의 발길을 이끌 두 가지를 모두 갖춰서인지 장사도 제법 된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민이 있다. “이 앞에 난 은행나무길은 예전부터 도로계획이 잡혀 있었어요. 지금까지 공사를 한다 안한다 말도 많았구요. 그런데 문제는 말만 떠돌고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거에요. 도로가 빨리 정비가 되던가 해야 우리도 깨끗하게 해놓고 살죠. 공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렇게 헐은 곳에서 장사하고 있거든요. 이곳은 전통도 있고 이름도 있으니까 조금만 깔끔하게 해놓으면 장사가 정말 잘 될 텐데, 식당이 이렇게 헐어서 누가 다니겠어요. 단골들이나 다니지 깔끔한 사람들이 오려고 하겠어요.” 전주시는 아직 정확한 공사 일정을 잡진 못했지만 늦어도 2009년 안에는 이곳 은행나무길 정비 완료를 계획하고 있다. 애초 기존의 8m 폭을 15m로 늘릴 계획이었지만, 도로가 너무 넓다보면 <한옥마을>의 분절현상과 일부 한옥을 파괴해야 한다는 부작용 때문에 기존의 폭을 고수하기로 했다는 것이 전주시의 설명이다. <한옥마을>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설명회도 몇 차례 가졌다. 덕분에 손씨도 전주시의 <한옥마을> 육성책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 30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만 저쪽 태조로 쪽은 많이 변하고 있더라구요. 전주시 차원에서 <한옥마을>을 변화시킨다니 좋은 일이죠.” 그래서 손씨는 여건이 되는 한 <한옥마을>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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