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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 | [문화저널]
[박남준의 모악일기] 내일은 하늘이 반짝일 거야
박남준(2003-04-07 11:05:06)
도라지꽃이 한창이다. 어쩌면 도라지꽃은 별처럼 그렇게 총총히도 피어있는 것인가.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도라지꽃을 볼 때마다 시인 백석의 눈물나는 애잔한 시 [여승]이 생각난다. 꽃이 우리에게 즐거움과 평화를 주기 위해 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날에는 꽃을 대하는 일이 기쁨과 안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게 된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마당 앞 나무 그늘아래 노랑원추리 꽃은 햇빛을 보는 시간이 적어서인지 오후 늦은 무렵에야 꽃잎을 열어 밤을 꼬박 새우다가 아침이면 지고 만다. 저 꽃들이야 다시 내년을 기약하겠지만 우리 사전엔 내일이 없다는 하루살이의 삶처럼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힘겨운 삶들이 우리 곁엔 들꽃처럼 가득할 것이다. 누군가에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오고 가며 스치는 생명들에게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기쁨의 활력을 주며 위안이 되는가 아니면 피곤함을 불러일으키며 짜증이 나는 존재인가. 미처 생각하지 않고 울컥 내뱉은 말 한마디에 깊은 못이 박혀 신음하고 있는 내 이웃은 없는가. 나도 모르게 휘두른 날선 칼날에 가슴을 베어 뚝뚝 생피를 흘리는 사람은 없는가. 있을 것이다. 어찌 없었겠는가. 삶이 두렵다는 생각을 일으키던 날들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생각이 이쯤 이르고 보면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 지며 식은땀이 나고 내안의 어딘가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 며칠 집을 떠났다 돌아왔다. 며칠이나 되었겠는가. 어느새 집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칡순이며 억새, 가시 돋은 환삼덩굴, 사위질빵덩굴 온갖 풀덩굴들이 길섶을 가득 덮어 길을 가로막는다. 저 여린 것들의 어디에 그렇게도 지독한 생명력이 숨어있었을까. 낮이라면 그 길섶에 숨어 빨갛게 익은 산딸기라도 따먹으련만 늦은 밤 어둠을 헤쳐나가는 휘청거리는 발길, 풀섶에 반짝이며 이슬을 피하는 반딧불이가 그나마 위안을 준다. 장마철의 습기며 삼복의 무더위가 작은 산중이라고 어디 피해가겠는가. 문을 열면 퀴퀴한 냄새, 내 낡은 방안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자리잡은 거미, 좀 벌레, 다리 많은 그리마 희고 푸른곰팡이들이 저마다의 한철을 희희낙낙 거리며 있을 테지만 너희를 어찌 하기엔 난 이미 충분히 지쳐있다. 눅눅한 방바닥에 몸을 눕힌다. 방안 가득 밀려오는 개울 물소리가 잠시 몸을 맑게 한다. 한때 나도 누군가의 삶 속에 저 청량한 개울물소리로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문득 문밖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참 맑기도 하다 별빛 푸르른 밤. 내일은 이부자리도 고실고실 말리고 음 그래 돗자리도 죽부인도 그래 내일은 하늘이 반짝 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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