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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6 | [문화저널]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현재혁 남부지방산림관리청 구미국유림관리소(2004-06-12 11:57:32)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말러와의 만남 벌써 여름을 느끼게 하는 4월말, 낯선 곳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무척이나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문화저널’로부터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라는 코너에 글을 써 달라는 말 그대로 ‘원고 청탁’이 들어온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나에게 이게 무슨 일이람? 일단 승낙은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후회만 쌓일 뿐, 단호히 거절하지 못한 내 성격을 탓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라는 제목이 싫지 않기에 용기를 내어, 클래식음악이 나에게 준 감동, 특히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가 나에게 준 그 가슴벅찬 감동을 말해보고 싶다. 중 고등학생 시절 FM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음악이 그렇게 싫지만 않았지만 누구 곡인지 그 곡의 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막연히 좋아만 하다가 대학생활 후반 무렵부터 LP레코드판을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그냥 유명한 바흐, 모짜르트, 베토벤 곡들만 듣고 혼자 좋아하곤 했다. 용돈 아껴가며 원하던 음반을 살 때 그 떨리는 가슴 설레임은 지금은 느끼기 어려운 소중한 감정들이었다. 그 후 공무원 생활이 시작되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생활을 하다가 후배의 소개로 아무추어 고전음악감상 동호회인 뮤즈를 알게 되었다. 음악을 전공하거나 배운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회원들의 클래식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넘치는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상 장소마저 대구에서 수십년간 고전음악감상실로 유명한 하이마트 음악감상실이었다(요즘 잘 나가는 전자제품판매점이 아님) 그렇게 매주 토요일마다 다양한 레파토리와 동서양의 유명한 지휘자들의 공연실황을 녹화 감상하는 그 매 순간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2000년 여름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음악감상실에 도착한 관계로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불꺼진 감상실 의자에 앉자마자 곡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그 곡이 주는 강렬함과 거대함이 80분 내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속을 파고 들었으며 끝내는 마지막 악장에서 이 곡이 전달하는 비극적 메시지 앞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곡이 바로 말러교향곡 제6번 ‘비극적’이었으며 이렇게 말러와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후 도대체 말러가 누구이기에 이처럼 내 가슴을 파고드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잠시 살펴보면, 그는 1860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으며 처음에는 지후지로 명성을 얻었으며 지휘자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함으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이라는 명제를 가까이 지켜봐 왔으며 자신의 사랑하는 두 딸마저 잃었고 자신마저 심장병으로 1911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교향곡 작곡가로 불멸의 경지를 이룬, 특히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위대한 음악작업을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바흐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독일음악을 이어받았고 동시에 20세기로 가는 길목에서 쇤베르크, 베베른, 브리튼 같은 작곡가에게 길을 열고 큰 격려를 준 음악가였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말하길 말러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거인의 모순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러의 음악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쓴 것이고 그 안에는 유대교 대 기독교인, 확신자 대 회의론자, 순진무구한 사람 대 세련된 사람, 시골 보헤미안 대 상류사교계 인사, 파우스트적 철학자 대 동방적 신비주의자 등 모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모순이 그의 음악을 오늘날 세계인을 사로잡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도 너무나 인간적인 이런 모순 때문에 말러에게 더욱 끌린다. 그의 음악은 신에 대한 절대적 존경과 자연에 대한 찬미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해왔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때로는 깊은 절망과 인간적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삶과 인생 그리고 음악세계를 알면 알수록 말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생기게 되었다. 나또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기에 내 앞에 주어지는 삶들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어린시절 뇌성마비장애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특수학교를 다녔으나 어차피 이 세상은 보통 사람들의 세상이라는걸 일찍 깨달았기에 나 스스로가 세상기준에 맞춰 살려고 애써왔다. 그래서 대학생활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나 졸업무렵부터 사회의 두꺼운 벽앞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벽앞에 쓰러지긴 싫다는 오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쉬운 생활이 아니 였기에 때론 민원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장애자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다는 욕심으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생활해왔으며 장애인시설에 대한 봉사활동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그러나 나또한 약한 인간적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절망에 빠지기도 했으며, 외로움과 고독 앞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수도 없이 많았다. 말러를 알게된 당시에도 내 앞에 주어진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사회적 괴리감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든시기였다. 그러한 때에 말러의 비극적 음악을 접했을때 누구보다도 그의 음악이 내 영혼을 울렸다. 그의 음악은 비극과 절망, 삶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나또한 처음에는 그의 음악에서 느끼는 절망적 비극 앞에서 깊숙이 침몰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표면적이였다. 그의 절망, 그의 비극 그리고 고독은 바로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였다. 절망은 절망 그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였고, 비극은 비극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였다. 고독은 바로 자기 영혼에 대한 깊은 애정이였으며, 신에 대한 신뢰 그자체였다. 인간과 신에 대한 절대사랑이 있어야만 절망과 고독을 내 안에서 승화시킬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말러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말러교향곡 제9번 1악장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 사라져가는 나의 젊은 나날들이여. 오! 모두 흘러가 버린 사랑이여…’ 하지만 사라져가는 젊은 나날에 대한 아쉬움과 흘러가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만을 표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가오는 날들에 대한 희망이고 부활이며, 사랑에 대한 완성이라고 믿는다. 나또한 앞으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 영혼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절대존경으로 언제나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오늘도 말러와의 깊은 만남앞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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