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 | [삶이담긴 옷이야기]
삶을 위한 패션
최미현 / 패션디자이너(2004-06-12 11:42:12)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를 하느라 여기저기 땅이 파헤쳐지고 있다. 붉은 흙이 쌓여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마치 공룡처럼 버
티고 있다. 오가는 차만 없다면 신석기 시대의 풍경이 저렇지 않았을까 싶다. 바위 옆에서 두 명의 청년이 측량을 하고 있는데
카키색 사파리 점퍼에 커다란 주머니가 옆으로 달린 카르고 팬츠(Cargo Pants)를 입고 모자를 쓴 모습이 마치 지질학 탐사대일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가끔 길을 가다가 눈에 띄는 옷차림들을 만나게 되는데 트랜드 세터 (trend setter)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우리 집 가까운 네거리의 교차로에서 도너츠와 생수를 파는 아저씨가 있다. 한 여름 뙤약볕에도 열심인 이분은 군복바
지에 군화를 신고 검은 티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데 볼 때마다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어딘가 공사현장에서 붉
은 색과 파랑 색이 섞인 바지를 입고 그물셔츠를 입은 사람을 보았는데 평소의 길거리에서였다면 우스웠을지도 모르는 옷차림이
오히려 시원하게 보였다. 차를 타고 시골길을 지나가다 만나는 할아버지들의 양복에 맥고 모자를 쓴 모습도 삶의 냄새를 풍기
며 점잖아 보이고 바람에 날리는 할머니들의 치마 자락도 왠지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 것만 같다. 산길에서 바람을 가르듯
스쳐 지나가는 스님의 동방 자락에는 피안의 소식을 담고 있을 것만 같다. 패션쇼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나는
오히려 이런 일상의 옷들에 더 감동하게 된다. 패션쇼 무대에서 보여지는 의상을 보노라면 대부분 보여주기 위한 의상 그 자
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강렬한 조명과 팔등신의 모델들이 입은 옷은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서 모두 연출되어진 것들이다.
누가 패션쇼 무대에 올려진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며 누가 가슴이나 엉덩이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는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이상한 것은 디자이너들이 보여주는 극단적으로 다양한 의상들이 장관을 이루는 중에도 거리의 패션은 오히려 평균율을 유지하고
있다. 대중은 그 어떤 시대보다 자율적이고 뛰어난 평형감각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패션은 열광적인 환영도 받지 못하
면서 널리 퍼진다. 또 패션은 과거만큼 급진적으로 변하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또 사람들이 그만큼 유행에 종속되지 않는다
는 것이고 유행이라는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새로운 너를 창조하라'는 광고의 문구도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거리를 보면 모
든 사람이 다 그렇고 그렇게 보인다. 젊지 않은 사람도 젊은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소녀들이 소년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옷
차림을 하고 있다. 유행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전 세계인들이 모두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아
이러니한가! 민속의상은 사라지고 그 옷을 치장하던 아름다운 장신구와 염색법과 수공예 기법들도 따라서 세월의 저편으로 점차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다른 민족의 의상에서 영감을 받아서 현대적으로 응용하였다. 그것들이 아름다운 이유
는 바로 시간을 두고 축적된 감각과 기술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는 절대 기준은 민족이
나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인데 오늘의 우리는 너무나 획일화된 잣대에 의해서 평가하고 평가 받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입는 옷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이런 기준을 무시할 수 있는 파격에서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