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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 | [안영이노의 문화비평]
녹색 땅을 넓히는 힘, 녹색 땅을 꿈꾸는 힘
안이영노 | 문화기획자, 문화평론가(2004-06-12 11:27:43)
내 고향은 서울이니, 난 서울 땅에 관해 이야기를 하겠다. 어린 시절부터 사냥놀이하면서 풀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을 나는 즐겼다.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자연을 노획하는 탐험가를 흉내냈고, 수풀 사이에 숨어 총알을 쏘아대는 전쟁터의 영웅 모습으로 풀들을 짓밟으며 뒹굴었다. 나무가 우거지고 멀리 산이 보이는 도심의 변두리에서 행복한 유년을 보낸 것은 아니다. 도심 한가운데서 난, 어찌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잡풀들과 지나치게 깨끗하게 가꾸어진 잔디밭 사이에서 난, 조금도 ‘자연’답다 할 수 없는 조그만 면적의 녹색 땅들만 뛰어다니면서 꿈을 꾸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한강가의, 아파트가 쭉쭉 올라가는 개발지구에서 탁해진 강물과 그 옆에 높이 솟은 억새풀숲, 그리고 들풀이 뒤덮인 공사부지, 미개척지 같은 늪지와 아파트 단지의 사람 손으로 가꾼 잔디밭 등을 모두 무대로 삼아 뛰어다녔다. 이런 곳을 뛰면서 우리의 상상력은 그 세계를 아마존 정글로 바꾸고 유럽의 침엽수지대, 오아시스를 배경으로 한 이집트의 사막지대 등으로 바꾸었다. 비록 우리 머릿 속의 그림들 역시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자연을 착취하듯 개척하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TV 미디어 속의 서양 영웅을 따라하는 장면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회색 개발지대의 초라한 녹색 짜투리 공간을 또 아프리카의 스탭지대나 화려한 사원과 열대과수, 밀림이 공존하는 인도대륙의 모험지대로 바꾸었던 것이다. <꿈꾸지 않으면 자연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녹색공간의 모험놀이는, 회색 도심에서 숨통을 트고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그 당시의 어른들이 보기에는 말 그대로 아이들 장난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어른들은 모두 잘 한다. 이 회색의 국제도시 안에서 우리가 숨통을 트는 방법은 콩크리트 사이의 작은 녹색공간이라도 찾아 위안을 삼는 것과, 그 작은 쌈지공간에서라도 대자연의 꿈을 꾸고 즐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서울과 같은 메트로폴리스를 사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초록색 환경을 보존하고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산과 나무의 고마움을 알고 이를 도시 공동체에 요청하는 시민들이 꿈을 꾸거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를 즐기지 않는다면, 여전히 자연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농촌으로 주말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보기 전에, 우리가 사는 곳의 작은 녹색 땅을 감사하며 초록색 환경에서 숨쉬는 아름다운 꿈들을 꾸어야 할 것이다. 아파트와 침대생활과 양변기가 더 편안한 나 같은 도시 아이들은 동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몸집이 작은 우리들 눈에는 높은 억새풀이나 작은 공원잔디조차 감사할 만한 놀이터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상력의 정글이었으며, 우리를 감싸주는 초록색의 우주였다. 비록 우리가 자연을 살피지 않으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를 체득하게 하는 제대로 된 생태교육을 받지 못 하고 강압적으로 자연보호헌장을 외우고 성적을 평가받는 것과 같은 원시적인 수준의 학교교육을 겪고 있었지만, 우리는 숲풀이 우거진 한강변이나, 영등포의 북쪽 습지에서 코끼리가 살 것처럼 여겼다. 왜 도시 속에서도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지 쉽게 풀어서 가르치는 교사가 단 한 명도 없던 시대였으나, 적어도 자연 속에서 뛰어 노는 아름다운 상상의 놀이만은 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꿈 속에서는 멀리 보이는 남산이 히말라야로 변했다. 비록 자연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 한 도시의 아이들이었지만, 커다란 공사용 모래산으로 뒤덮힌 여의도 63빌딩의 개발현장에도 사막의 짐승들이 살 것처럼 여겼다. 결국 나는 도시에서만 자란 철부지이기 때문에 낭만적인 상상이 가능했던 것 같다. 어른들은 꿈도 꾸지 않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도심 한 가운데서 망쳐진 잡초지대나 잔디밭 같은 죽은 자연, 인공자연에서도 메뚜기를 찾으려는 순수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 꿈을 꾸기보다 휴일에 시골로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어른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아이들의 문화는 오늘날 도시를 더 자연에 가깝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충분한 생태교육을 보급받는 아이들이 너무 잘 알기에 꿈꾸지 못 할 법한 황당한 것들은, 차라리 환경문제에 무지한 그 당시의 아이들은 마구 상상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철없는 마음은 서울 어딘가에도 숲만 있으면 호랑이가 살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도시 아이들의 생태적 지식은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적어도 당시의 나는 서울의 숲에 호랑이는 아니더라도 여우나 오소리 정도는 살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열광했던 표범이나 호랑이같은 맹수 뿐 아니라 너구리나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조차 그 도시의 숲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초등학생을 면할 때까지, 남산의 나무 사이에 표범이 늘어져 낮잠을 자고 낭만적인 정글놀이를 하기 좋게 잔뜩 우거진 한강가의 억새풀 속에 호랑이 어슬렁거리기를 바라는 내 꿈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도심에 자연을 키우는 것은 문화의 힘이다> 러브조이 아일랜드(lovejoy island)를 아는가. 그 땅은 자연으로 보이지만 허리가 끊겨 더 이상 생태계가 활발하게 유지되지 않는 쓸쓸한 땅이다. 불행히도 도시의 어린 소년이 수풀 속 메뚜기와 호랑이를 보려는 꿈을 잃게 된 것은 한강가의 억새풀이나 아파트의 예쁜 잔디밭이 러브조이 아일랜드임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도시에서 자연을 즐기는 아이다운 놀이가 사라진 것은, 환경교육이나 자연수업, 그리고 동물도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도심의 작은 공원이나 도로변의 풀밭, 그리고 덕수궁의 잔디밭이 모두 러브조이 아일랜드임을 알게되면서부터다. 내가 자라던 그 시절부터, 도시의 난개발을 통해 마음 속의 밀림, 사냥과 모험이 가능했던 도시 속 초록색 땅은 모두 하나둘씩 러브보이 아일랜드가 되어갔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아파트 단지의 잘 꾸며진 숲, 그리고 잘 꾸며진 놀이동산의 정원 조경을 보라. 그나마 러브조이 아일랜드가 아니었던, 즉 도시밖의 거대한 생태계의 맥이 닿아있던 한강가와 인왕산 역시 도로와 아파트에 치여 외부의 자연과 단절된 러브조이 아일랜드가 되어가고 있다. 러브조이 아일랜드는 한마디로 어항이나 수족관과 같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이미지들이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생명을 가두는 동물원은, 우리 스스로 짜놓은 매트릭스다. 우리의 모태인 자연을 잃는 두려움에 스스로 애써 만들어낸 환경이니 어찌 보면 쓸쓸하고 처절한 게다. 직접 나무를 이식하고 농약을 치고 정원처럼 손질을 해 만들어낸 도심의 숲과 공원이지만, 이 매트릭스는 초록이 죽어가는 폐허 위에서 밀림을 꿈꾸는 아이들 마음의 상상을 능가하지 못 한다. 도심에서도 꽃을 키우고 폐허에서도 풀을 꿈꾸는 것은 문화의 힘이다. 좋은 문화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상상력에 다름 아니다. 녹색땅을 넓히고 노력이나 녹색환경을 보호하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와 예술이 마구 꿈을 그려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때를 놓친 도시에서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회의론만 키우게 될 것이다. 슬프게도 소년은 호랑이가 이 땅에 올 수 없음을 알았고, 메뚜기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더 호랑이가 오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성장해 가는 그 소년의 마음 속에서 꿈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소년들이 호랑이나 여우, 오소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꿈을 갖고 풀밭을 다시 거닌다면, 그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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