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 | [문화저널]
김규남의 전라도 푸진 사투리
김규남 / 언어문화연구소장(2004-06-12 10:47:25)
그리운 ‘맥칸더 브이’
“산고라당으 가서 두께비허고 호랭이허고 퇴끼란 놈허고 스이 어쩌케 저들찌리 사는디”
“할머니! 두꺼비랑 호랑이랑 토끼랑 어떻게 같이 살아?”
“그렁게 이얘기지이.”
“응~”
“동지섣달 눈은 퍼얼펄 날리고 보닌게 먹을 것이 없어. 배가 쪼록쪼로옥 허고 인자 서로 낯바닥만 몰곳이 치다보고 있은게,”
“할머니 ‘몰곳이’가 뭐야?”
“배는 고픈디 어떻게 헐 수가 없으닝게 그냥 매급시 얼굴만 멀뚱멀뚱 치다 보는 거여.”
“응”
“그런디 퇴끼란 뇜이 그리도 조깨 영리허다고 꾀를 내가지고, 퇴끼 시기는 대로 호랭이가 어느 부잣집 곡간으로 들어가 가지고서는 찹쌀을 솔찬히 도적질을 허고, 또 시루를 도적질히다가 바우 트매기다가 두께비란 놈보고 불 때라고 힜댜아.”
“호랑이가 토끼 잡아먹으면 될 텐데...”
“아, 그리도 저들찌리 항꼬 사는디 잡어 먹으먼 쓰겄냐, 모다 친구들인디..”
“응”
“이것을 어치케 어치케 히갖고 떡을 우물쭈물 맹글어 놓고서 보니, 어쩌케 굶주린 짐승들이든지 혼차 먹어도 양이 모지래게 생깄드리야. 그리서 호랭이가 꾀를 낸다는 것이 모집이 속으다가 떡을 돌금돌금 저범저범 히 가지고 한바구리를 꽉 느가지고”
“할머니 모집이가 뭐야?”
“옛날으 그 대막가지로 짜서 맹근 것 있어. 바구리맹이로”
“응? 대바구니?”
“그려, 그리서 상상말랭이 산뽁대기 올라가서 이놈을 궁글려 가지고 질로 밑이 내리가서 먼저 잡는 놈이 다 먹기로 힜당만. 근디 두께비란 놈이 그러믄 바구리를 내가 궁글릴란다고 그맀댜. 그런디 두께비란 놈이 한쪽은 꾹 눌르고 한 쪽은 비시감치 열어놨단 말여. 그리갖고 바구리를 냅다 궁글린게 한 바쿠 굴러가먼 한 뭉텡이, 한 바쿠 굴러가먼 또 한 뭉텡이 썩 떡이 빠져 나오는디, 퇴깽이란 놈은 앞발모가지 짤룬 것이 한 쪼객이라도 얻어 먹겄다고 죽자살자 뛰어쌓고, 호랭이란 놈은 떨썩떨썩 내리가서 보닌게 결국 산 중턱까장 오다가 떡은 싹 빠져버리고 빈 바구리만 데걸데걸 궁굴러 내려 왔드라 이거여.
“할머니, 토끼가 빨라, 호랑이가 빨라?”
“퇴끼는 뒷발이 질고, 앞발모가지가 잘롸서 올라는 잘 가는디 내리갈 때는 잘 못 뛰는 것이거든”
“그렇구나”
“그리갖고 퇴끼는 그 담박질 허고 숨이 가뻐서 방정맞은 인생이 되고 호랭이는 죽을만치 욕만 보고 하나도 얻어 먹들 못히서 고로코 싸납게 되았고 두께비는 그 떡 많이 먹어서 배아지가 불쑥허다고 허는 말이 있디야.”
“히, 정말로?,
“그려, 안 고로코 생겼드냐, 뙤끼는 자발맞고, 호랭이는 사납고, 뚜께비는 배아지가 뿔룩허고...”
“정마알!”
호랑이와 토끼와 두꺼비가 함께 살 턱이 없고 이 짐승들이 떡을 만을 수도 없을뿐더러 저희들끼리 무슨 작당모의를 할 말 또한 통하지 않을 것이니, 이 이야기는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토끼의 인생과 호랑이의 성품 그리고 두꺼비의 몸매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 엇비슷하게 들어맞아 마치 이 이야기가 각각의 짐승들이 그렇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것 같아 황당한 이야기치고는 제법 이치에 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호랑이, 토끼, 두꺼비를 마치 덩치 크고 우악스럽게 생긴 녀석과 재빠르고 자발 맞은 놈 그리고 둔하고 못생겼지만 그래도 제몫을 은근히 잘 챙기는 의뭉한 녀석쯤으로 여겨주고 그런 녀석 셋이서 산중턱 어디쯤에 있을 동굴 속에서 함께 웅크리고 앉아 작당을 하고, 떡을 만들고, 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시끌벅적한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재미다.
이 이야기는 지금 같으면 텔레비전의 전래동화 프로 ‘은비까비’에서 사람처럼 묘사된 세 짐승들이 친절하게도 우리의 상상을 대신해서 그려지고 방영될 성질의 것이다. 말하자면 침대에서 서양식으로 잠드는 우리의 손자들에게 할머니의 무릎과 옛날이야기는 더 이상이 유년의 정서와 상상력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즉, 방언과 더불어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만이 아니다. 할머니의 손자, 손녀에 대한 애정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포근하고 따스한 정서이며 그것은 손자, 손녀에게 그들이 가져야 할 유년의 중요한 한 정서다. 그 자리를 텔레비전과 컴퓨터에 빼앗기고 예쁘고 싱싱한 목소리의 허상에 또 길들여지면서, 낡고 촌스러운 것 같은 할머니와 관련된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완전히 공백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일차적으로 형성하는 사회 교류망은 가족 구성원과의 교류를 통해서 형성된다.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과 누나, 형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등 그들과의 교류가 한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정서적 바탕을 형성하는 배경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한 인간의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형성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깊은 신뢰를 토대로 한 인간적 교감이며 이는 모두 만지고 안아주고 하는 따스한 신체 접촉을 동반한 일상적 말하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 말하기는 물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방언으로 이루어지며, 그러므로 방언은 또한 모든 인간에게 일차적인 정서의 바탕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일차적 사회 교류망의 구성원들과 소재가 달라졌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고모, 삼촌이 담당해야 할 자리에 뽀뽀뽀 친구들과 유치원 선생님 그리고 텔레비전과 컴퓨터 게임 속의 허상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 아이들에게 정서의 원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성년이 된 우리의 아이들이 한가하고 조용한 저녁 한 때, 그들이 그리워 할 것이 혹시 ‘맥칸더 브이’ 쯤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