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 | [문화저널]
남형두 변호사의 저작권 길라잡이
남형두(2004-06-12 10:42:37)
‘지도’도 저작물인가?
얼마 전 군대에 가고 싶어서 시력표를 외워 말하는 청년을 소재로 하는 모 제약회사의 광고가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커다란 강당의 신체검사장에서 위아래, 좌우로 터져 있는 그 “C”자형을 흘끔흘끔 보면서 외운 경험이 많은 이에게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력표가 보호받을 수 있는 저작물인가가 재판의 쟁점이 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의료용구의 일종인 시력표에 대하여 저작물성을 인정하였다(대법원 1992. 6. 23. 선고 91도2101 판결). 따라서, 이를 임의로 복제하여 사용하게 되면 저작권법위반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중에서 판매되는 각종 지도도 저작물로서 보호될 수 있을까? 과거 사회과부도에 실린 천편일률적인 지도와 달리 최근 들어 특정 목적과 주제를 살린 차별화된 각종 지도가 많이 출간되고 있어, 이러한 지도에도 저작물성이 인정되는지에 대한 문의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에 대해서 대법원은 최근 저작물성에 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저작물이기 위해서는 문학·학술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창작물이어야 하므로 그 요건으로서 창작성이 요구되는바, 일반적으로 지도는 지표상의 산맥·하천 등의 자연적 현상과 도로·도시·건물 등의 인문적 현상을 일정한 축척으로 미리 약속한 특정한 기호를 사용하여 객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지도상에 표현되는 자연적 현상과 인문적 현상은 사실 그 자체로서 저작권의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할 것이어서, 지도의 창작성 유무의 판단에 있어서는 지도의 내용이 되는 자연적 현상과 인문적 현상을 종래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였는지 여부와 그 표현된 내용의 취사선택에 창작성이 있는지 여부가 기준이 된다고 할 것이고, 한편 지도의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미리 약속된 특정의 기호를 사용하여야 하는 등 상당한 제한이 있어 동일한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 한 그 내용 자체는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대법원 2003. 10. 9. 선고 2001다50586 판결)
창작물의 종류에 따라서는 그 표현방식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 더러 있다. 예컨대, 전화번호부, 경마표, 운전면허수험서 등과 같이 누가 작성하더라도 비슷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표현에 대해서는 그만큼 법으로 보호될 수 있는 저작물의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대법원은 지도 역시 그런 창작물 중의 하나로 판시하였다. 지도의 표현방식에 있어 도로, 하천, 학교, 논 등 이를 표시하는 기호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이미 있기 때문에 이를 도외시하고 새롭게 만들게 되면 지도 그 자체의 기능을 잃게 되고, 이를 그대로 따를 경우에는 창작성이 인정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저작물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 대법원판결에 의하더라도 지도의 경우 무조건 저작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기존에 국내외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기호나 표현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유형의 표현방식을 따를 경우, 창작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자연지리의 경우 표현방식이 극히 제한된다고 할 수 있으나, 인문지리의 경우 상대적으로 일반적으로 약속된 기호나 표현방식이 반드시 통일된 것은 아니므로, 얼마든지 독창성이 가미될 여지가 있다. 예컨대 내 고장 풍물지도, 음식점기행 등 특정 주제에 집중하여 작성된 지도의 경우 그 독창성 정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저작물로서 보호받을 수 있다. 땀 흘린 자에게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땀 이론”(labor theory)은 저작권법의 철학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