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4.6 | [문화저널]
화가의 산 이야기
이상조 전북대교수. 산악인(2004-06-12 10:40:30)
숭고한 정신, 에베레스트에 피다 5월에 필자가 접한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원정대 소식이 5개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어린이날인 5월 5일 들려온 반가운 소식으로, 2002년 8000미터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엄홍길이 등반대장으로 참가한 외국어 대학 원정대가 얄룽캉(8505m)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이다. 두 번째는 15일 경남 연맹이 로체(8516m)정상을 서벽을 통해 등정했다는 반가운 소식. 세 번째는 16일 인천대학교 에베레스트(8848m) 원정대의 정상 등정 소식. 네 번째는 이 글을 쓰고 있던 중에 날아들어 글의 방향을 바꾸게 한 20일 대구 계명대학 에베레스트(8848m) 원정대의 비보이다. 마지막은 21일 알려진 우리나라 산악계의 숙원인 로체 남벽을 목표로 한 원정대가 기후 때문에 철수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이다. 야누스와 같이 두 개의 극명한 얼굴을 가진 이러한 성공과 실패에 관한 소식은 많은 산악인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등정에 성공한 팀들이야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등정에 실패하거나 조난 사고를 당한 팀들의 정신적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또한 웬만한 산악인들이면 산에서 서로 마주치며 교류한 경험이 있거나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 만큼 어느 팀을 막론하고 조난 사고 소식을 접한 산악인들의 마음은 비통해 진다. 산악인들간의 등반 중에 쌓이는 우정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것 이상으로, 생명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각별하다. 실재로 몇 편의 단신으로 날아온 대구 계명대학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조난 경위를 조합해 보면 고인이 된 세 대원 모두 동료애를 발휘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도로 훈련된 산악인일지라도 8000미터 이상에서의 행동은 희박한 산소와 고소이기에 쉽게 느껴지는 피로감으로 인해 불안하다. 따라서 대원 각자의 안전조차도 본인이 보장할 수 없다. 그 위험도는 악천후 일 경우 더욱 더 높아진다. 그러기에 그 곳에서 동료의 안전을 위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행위는 순간적으로 자기의 생명과 동료의 생명을 맞바꿀 수 있기에 진한 동료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계명대학교 원정대의 경우 두 명의 대원이 정상을 등정한 후 하산 길에서 조난되었다. 첫 번째 조난이 확인된 박무택 등반대장은 2002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른 것을 포함해 K2 등, 히말라야 8000미터 봉우리 6개를 오른 고산 경험이 풍부한 훌륭한 산악인이었다. 그런 그가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나 고글을 잃고 설맹으로 눈이 안보이고 탈진한 상태에서 8750미터 이상의 고소에 남아 동료대원에게 하산을 명령하였다. 그 명령은 자신을 버리고 동료의 생명을 구하고자한 결단이었을 것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베이스 캠프와 교신한 “ 나는 심한 설맹으로 눈이 안보이고 탈진하였다 장민 대원을 혼자 하산시킨다” 는 급보를 전해들은 필자는 가슴이 저려 한동안 어쩔 줄을 몰랐었다 . 등반대장을 고소에 남겨두고 홀로 하산하던 두 번째 조난자인 장민 대원 역시 비록 악천후에 최악의 상태였다고는 하나 마지막까지 대장과 같이 하산하려는 처절한 투쟁이 있었을 것을 필자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마지막 조난자인 백준호 대원은 캠프5 (8300m)에서 개교 50주년 기념일에 맞춰 2차 등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난사고 소식을 접한 그는 셀파 2명과 함께 대원들을 구하고자 조난지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악천후로 생명에 위협을 느낀 셀파들은 캠프5로 하산하였다. 그는 홀로, 에베레스트 등반 중 가장 어려운 지점인 세컨드 스탭을 넘어 박대장과 만났다. 백대원이 베이스 캠프와 교신한 “박대장을 만났고 같이 하산한다”는 내용은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산악인인가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 높이, 그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대장과 같이 하산하던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8750미터 지점에 박대장을 고정시키고 실종되었다. 후에 그의 시신이 장민 대원의 시신과 같이 발견되었다는 사실로 마지막까지 장민 대원을 구하려한 그의 초인적인 의지를 증명할 수 있기에 비감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느 누가 그 상황에서의 그들의 속내를 알 수 있을까? 매순간 무섭게 닥쳐오는 위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피를 말리는 사투를... 동료를 구하고자하는 동료애와 생명의 본능과의 갈등을...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영원히 그곳의 만년설과 함께 하며 연약한 우리들의 표상이 되길 빌어 본다... 조난을 당한 대원들의 가족과 동료대원, 학교 관계자 모두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5월 29일은 에베레스트가 초등 된지 51주년이 되는 날이다. 1921년의 첫 시도 후 32년만인1953년 영국등반대의 힐라리와 셀파 텐징 노르게이에 의해 초등 된 에베레스트는 그 이후 지구상에서 최고 높은 정점이상의 의미를 지닌 산으로 변모한다. 계명대학교와 인천대학교가 개교 5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을 계획한 일은 에베레스트의 상징성 때문이리라... 이 참에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꾸며 본 여러 기록을 소개한다. 이 기록은 2003년 5월 MOUNTAIN지가 작성한 것을 참조한 것이다. 에베레스트는 50년 동안 그 꼭지점에 1659명의 인간을 올려놓았다. 또한 175명의 산악인이 그 품에서 사망하였다. 1953년부터 2002년까지 한해에 가장 많은 등정자가 탄생한 해는 2001년으로, 모두182명이 등정에 성공하였다. 하루에 가장 많은 등정자가 오른 날은 2001년 5월 21일로 88명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였다. 이 기록은 기술의 개발과 장비의 발전으로 에베레스트의 등반이 쉬워졌다는 점도 있지만 그만큼 많은 원정대가 상징적인 봉우리인 에베레스트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실제로 2000년 이후 에베레스트에는 매년 150명이 넘는 인원이 등정에 성공하고 있다. 반면 한해에 가장 많은 등반가가 사망한 것은 1996년으로 15명이다. 1996년 5월 11일은 하루에 8명이 사망한 참사가 일어난 날이다. 이 사고는 로브 홀과 스코트 피셔가 이끈 합동 상업등반대에서 일어난 사고이다. 이 사고는 유능한 등반가인 로브 홀과 스코트 피셔가 그들의 손님들을 구하려다 같이 사망하여 충격을 준 사고였다. 그들의 조난 장소도 이번 우리나라 등반대의 조난 장소와 동일하다. 이 사고 기록은 당시 등반대에 참가한 미국의 기자인 존 크라카우어가 ‘Into thin air’ 라는 소설로 발표하여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희박한 공기 속으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읽은 이들에게 8000미터 고지에서의 조난 상황과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동료애와 책임감에 관한 것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최고령 등정 자는 2002년 5월 17일 등정한 65세 176일의 일본의 산악인 토미야수 이시카와이며 최연소 등정자는 2001년 5월 23일 오른 네팔의 템파 트쉬리로 16세 17일 이었다. 여성 산악인은 1659 명의 등정자의 4.6%인 77명으로 이중 한국 여성은 안나프루나를 등정하고 하산하다 실종된 지현옥이 이끈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지현옥, 이순주, 최오순 3인이다. 에베레스트를 두 번 이상 오른 여성도 6명이다. 5월의 우리나라 히말라야 원정대의 소식을 정리하다 더 오를 곳이 없는 지구상의 꼭지점 에베레스트에 관한 여러 성공과 실패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등반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정상을 등정했느냐 못 했느냐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등반은 오르는 사람마다 목표가 다르고 팀마다 추구하는 등반의 세계가 다르다. 또한 비록 정상에 오르고 돌아 온 뒤 대원들 간에 반목하여 팀이 사실상 와해된 사례는 성공으로 보아야 할까? 많은 원로 산악인들이 원정대의 발대식에서 하시는 덕담 중에 “원정의 성공은 대원 모두가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말씀을 항상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다. 이 글을 끝낼 즈음 우리의 여성산악인 오은선이 5월 20일 단독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