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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6 | [교사일기]
그리운 '엄마 뽀뽀'
유상신/ 1965년 전북 완주군 비봉출생에서 출생했다.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교육과를(2004-06-12 09:38:13)
글/ 유상신 (군산산북중학교 교사) 안녕하세요? 저 상준이에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작년 2학년 때의 학교생활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엄마 뽀뽀’에요. 그땐 아이들 모두가 ‘엄마 뽀뽀’를 피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자주 생각이 나요. 아마 우리 반 아이들 모두 한번씩은 ‘엄마 뽀뽀’를 해보았을 걸요? 지금도 작년 우리 반 친구들을 만나면 ‘엄마 뽀뽀’이야기를 많이 해요. 엄마 뽀뽀는 무서우면서도 재미있었죠. 지금도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2004년 5월 7일 선생님의 아들 상준 올림 이 편지는 작년에 우리 반이었던 ‘씨름판의 작은 고추’ 상준이가 보내준 것이다. 며칠 전 스승님께 감사편지 쓰기란 교내행사가 있었다. 내게도 한 뭉치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작년에 담임을 했던 우리 반 아이들이 보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편지에는 한결같이 ‘엄마 뽀뽀’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보낸 사람 이름 난에는 ‘선생님의 아들이나 딸 드림’이라고 씌어져 있는 편지가 많았다. 편지를 받고 난 후의 기분 좋은 여운으로 나는 며칠동안 아이들과의 행복한 추억에 젖어 지냈었다.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자칭 서른여섯 명의 학교엄마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반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자동으로 나의 아들, 딸이 되었다. 살짝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며 "얘들아 엄마 왔다!"하고 너스레를 떨면, 킥킥거리며 한마디씩 던지는 아이들 소리로 우리 반의 아침은 늘 한바탕씩 떠들썩해졌다. 장난기가 발동하는 날엔 ‘이모’도 되었다가 ‘언니나 누나’가 되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도 장난으로나마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아이들을 "엄마 아들 1번 민교야, 엄마 딸 23번 현주야"하고 불러주었다.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우리 반 아이들이 나는 자꾸만 좋아졌다. 그러나 서른여섯 명의 아이들을 날마다 상대하는 일이 어디 그리 만만하기만 할까? 날이 갈수록 학기 초 정해놓은 학급 규칙들은 힘을 잃어가고 종례 한번 할라치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악다구니를 써가며 아이들을 혼내는 일은 절대로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반만의 재미있으면서도 효과적인 벌칙이 필요했다. 그 때 생각난 것이 ‘엄마 뽀뽀’였다. 출근할 때마다 나는 초등학생인 아들 녀석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뽀뽀로 표현했었다. ‘엄마 뽀뽀’하고 볼을 내밀면 아들 녀석은 내 얼굴에 온통 뽀뽀그림을 그려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던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녀석들도 제 엄마의 얼굴에 무시로 살갑게 뽀뽀를 해댔을 것이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제 엄마가 옛날처럼 ‘엄마 뽀뽀’하고 볼을 내밀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펄쩍 펄쩍 뛰는 모습이 안 봐도 훤했다. 하물며 선생님에게야……. 바로 그 점을 벌칙으로 이용해보기로 했다. 드디어 날을 잡아 아이들에게 새로운 벌칙을 공표했다. “애들아, 오늘부터 더불어 사는 즐거운 학급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벌칙을 적용하기로 한다. 앞으로 학급내의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종례시간에 ‘엄마 뽀뽀’라는 벌칙을 받게 될 테니 알아서 행동해라.” 아이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걱-’ ‘꺄-악’소리를 질러대더니 “절대로 ‘엄마뽀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난리법석을 피웠었다. 그렇게 시작한 엄마 뽀뽀로 인해 우리 반에는 우리들끼리만 통하는 새로운 언어와 웃음거리가 끊임없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학급경영도 예전보다 훨씬 순조로워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맨 처음 ‘엄마 뽀뽀’를 하게 된 민석이의 표정은 지금도 눈에 잡힐 듯 선하다. 남학생 대여섯 명이 복도에서 축구하고 놀다가 내게 걸린 날이었다. 죽어도 엄마 뽀뽀는 못하겠다며 끝까지 버티던 다른 녀석들과 달리 민석이는 쭈뼛거리며 교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가 싶더니 두 눈 질끈 감고 순식간에 내 볼에 뽀뽀를 하고는 제자리로 뛰어 들어 갔었다. 그 날 우리 반 교실이 ‘가갈갈갈’ 뒤집어 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날 이후 엄마 뽀뽀는 자연스럽게 우리 반의 특별한 벌칙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내가 깜빡 잊어버리고 벌칙집행을 하지 않는 날에는 “빨리 엄마 뽀뽀 시켜요!”하고 아이들이 먼저 성화였다. 규칙을 자주 어겨 ‘엄마 뽀뽀’ 단골이 되어버린 지훈이와 지운이는 그로 인해 더욱 정이 들었던 녀석들이다. 3학년이 된 지금도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면 "올해는 ‘엄마 뽀뽀’못하여 심심해서 어떻게 지내니? 그러니까 오랜만에 엄마한테 ‘엄마 뽀뽀’ 한 번 해줄래?"하며 볼을 내밀어 장난을 치곤 한다. 벌을 주려고 만들어 놓은 ‘엄마 뽀뽀’가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을 더욱 가깝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이 된 셈이었다. 학년을 마무리하는 종업식 날, 마지막 인사로 나눈 서른여섯 명과의 엄마 뽀뽀와 포옹의 감격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 날 나는 교단에 서서 서른여섯 명의 나의 학교 아들, 딸들에게 엄마 뽀뽀를 받았었다. 그리고 하나 하나 힘껏 안아주며 "그동안 더불어 행복했노라!"고 고백했었다. 올해는 무엇보다도 다시 초심자의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서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한해 담임을 거르기로 했다. 학기 초, 동료교사들이 “담임을 안 하니 얼마나 편하냐?”며 부러운 시선을 던지기도 했지만, 담임이 아닌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던 난 아침마다 허전한 마음에 괜스레 허둥대기 일쑤였다. 이제는 "애들아, 엄마 왔다."하고 외칠 아이들도, 종례시간이 되어 '엄마 뽀뽀'를 해줄 아이들도 없다. 그런 탓일까? 작년 우리 반 아이들과의 시간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리고 아직도 식지 않은 나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자꾸만 고백하고 싶어진다.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고 기꺼이 나의 아들, 딸이 되어 준 2학년 6반 아이들아. 너희들은 분명 지난 한 해 나의 사랑스런 아들딸이었단다. 내가 너희들의 학교엄마였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게. 사랑해."라고 말이다. 2004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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