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5 | [서평]
외래 개념의 극복이라는 화두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
박동천 교수(2004-05-23 14:32:26)
외래 개념의 극복이라는 화두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보수 행세를 해온 세력이 합리적 보수이기 보다는 외세에 빌붙거나
또는 군부 독재 아래 기생했던 수구 기득권 세력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총선거를 계기로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 지적이 옳은지 그른지는 결국 지금부터 이 나라 국민이 건설
해 나가는 정치사회의 윤리적 정체에 따라 판가름 날 일이니, 그 판정은 실제 현실에게
일단 맡겨 두기로 하자. 그 대신 이 나라의 보수 세력에 대한 비판에서 준거점에 해당하
는 이른바 “합리적 보수”라는 것이 어떤 내용과 속성을 가지느냐, 또는 나아가 그것이 이
러저러한 내용과 속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근거는 또한 무엇인지를 한번 따져보자.
“합리적 보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그 내용은 결국 지킬 만한 가
치를 지키자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민족주의, 정치적 평등에 대한 일정한 제한, 탁월한
소수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태도, 현실적인 외교 노선, 윤리나 양심보다는 안보나 경제를
중시하는 관심, 분배보다는 성장, 환경보다 개발, 등등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합리적 보수”란 이런 내용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준거를 이루는 바탕에는 서
유럽의 근대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것 역시 분명하다. 즉, 한국 사회에서 보수 행세를 해온
세력이 오늘날 문제시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 “보수”라는 포장 뒤에서 그들이 보여 온 행
태가 (서유럽의 경험과는 달리) 민족보다는 외세를 위한 앞잡이 짓이었고, 그들이 그럴듯
하게 내세운 보수의 이념과 원칙들은 다만 자기들의 근시안적 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이러한 진단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둘러싼 논란은 접어두자. 다만 이러한 진단에 기초
하여 현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나름
대로 탄탄한 자료와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시각을 옹호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러한
진단에 일정 부분 일리가 없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보자. 그랬을 때 파생하는 한 가지 질문은
왜 한국의 보수는 그처럼 비합리적이며 왜곡된 형태로 태어나 발전하게 되었느냐이다.
그리고 강정인 교수의 저작은 이 질문에 대하여 음미할 만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강교수는 세계사적 시간대와 한국사적 시간대의 괴리를 지적한다. 세계사적 시간대, 즉 서
양사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쟁은 일차적으로 17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각각
왕당파(또는 왕당파적 정치의식의 계승자)와 의회파(또는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벌어지다
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서 자유주의 체제 및 이념의 정착으로 귀결되었다
. 이후에는 이렇게 정착된 자유주의 체제와 이념이 “지킬 만한 가치”로서 보수의 대상
이 되었고, 이에 대한 도전으로 사회주의의 이념이 20세기 이후의 진보를 대변하게 되었다.
서구 국가들에서 오늘날 진보와 보수가 각각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지칭하게 되는 데
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45년의 광복은 보수할 대상을 창조해 내
어야 한다는 지난한 과제를 우리 사회에 동시에 안겨준 것이었다. 조국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이때 되찾은 조국이 결코 1910년 이전의 조선왕조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조국을
되찾음과 동시에 그 조국의 형체를 윤리적으로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형상화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분단의 결과 남녘은 미국의 영향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국식으로 이해된 자유주의가 대한민국의 공식적 체제이나 이념의 자리를 차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양심과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공중(公衆, the public)의 양식에
뿌리를 두는 헌정 질서, 개인의 적극적인 권리 주장 및 그 주장들 사이의 경쟁을 통한
사회발전 등으로 구성되는 자유주의의 이념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념을 이해하고자 하는 관심마저도 현실 권력을 둘러싼 투쟁에서 고지를 선점하려는
관심에 치어 밀려나고 말았다. 여기에 분단 및 전쟁이 더해지면서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된
권력은 서유럽의 자유주의와는 전혀 상반된 억압적이며 자의적이며 심지어 음모와 부패
까지를 마음놓고 저지를 수 있었던 폭력적이며 독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서유럽의 경험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자유주의 체제는 한국 사회의 경우 1987년까
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 후에도 성립이 완결되었다기보다는 아직도 그 성립을 위해
힘쓸 부분이 남아있는 현재 진행형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세
계사적 시간대에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대조되는 전형적인 보수 이념에 해당한다. 그리
하여 서구의 기준으로 보면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 쪽에서 보자면 20세기 보수
이념의 대표라 할 만한 사람들이 보수로 자리매김 되기는커녕, 서양사에 견주면 왕당파라
부름직한 편견과 자의성으로 점철되는 정치의식을 지닌 권력자들에 의하여 도리어 “빨갱이
”로 색칠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왜곡과 혼돈의 근저에 우리 지식인 사회의 서구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강교수
의 관찰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항간의 정치적 논쟁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준거점이 서구의 경험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인용과 준거가 아주 많은 경
우 피상적인 이해 또는 아예 잘못된 오해에 기초하여 한국 사회의 내면에서 불거져 나오
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초점을 흐리거나 쟁점의 폭과
파장을 키우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 등은 많은 경우에 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으로써 서구중심주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자 역시 이 책을
해답으로서 라기보다는 문제제기로 내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는
얼핏 생각하기보다 훨씬 어려워서, 외래 개념을 우리 전통에 접목한다거나, 동서양의 조화
를 꾀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덕담으로는 그 극복의 실마리조차 건드릴 수 없다. 외래 개념
은 서양을 이해하는 데서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현재 및 과거를 바
라보는 데에서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래 개념을 다 내 팽개친다고 해서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다만 적어도 이 문제의 본질을 이 정도로라도 명확하게 드러낸 공은 이 책의 저자에게 돌아
가야 하리라.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 바로 그럴 때일수록 그 문제의 본질적 성격을 파고
들어 밝혀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그러다보면 지금은 알지 못하는 어떤 경로로 해답이 눈
에 띌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 희망은 물론 그것을 가져야 할
그 어떤 실증적 필연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확히 똑같은 이유로 그것을 버려야 할 그 어
떤 실증적 필연성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이라는 화두가 객관적 과학의
영역에 속하기보다는 실존적 결단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 근거가 없으니 희망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근거가 없으니 희망이라도 가져야 할 것인가?
박동천 / 1964년 진도출생. 미국 오리건주 웰라멧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일리노이주 일리노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선거제도와 정
치적 상상력』(서울, 책세상), 『민주주의의 한국적 수용』(서울, 책세상)외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