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1.8 | [교사일기]
아름다운 웃음
서광리 동암재활학교 교사(2003-04-07 11:00:37)
'서서……선생님, 가가감사……합니다.' 또렷하진 않지만, 힘겹게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모습 뒤엔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다.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생각하면 새벽이슬에 젖은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상큼하기만 하다.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이곳에 발령을 받아 아이들과 함께 한 지 9년이라는 시간이 나의 모습을 치장하고 있다. 아직은 짧은 경력, 펜을 들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짧게나마 아이들의 아름다운 웃음을 그려볼까 한다. 체육대회, 일반학교에서라면 달음질치고, 서로 붙잡고 넘어뜨리고, 공놀이도 하고, 화려한 응원복에 요란한 응원전 등 여러 가지 열띤 모습들로 가득하겠지만, 휠체어에, 목발에 의지한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긴장감이나 화려함을 맛볼 수는 없다. 체육대회라는 말보다는 극기훈련 내지 혹독한 지옥훈련 정도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휠체어를 굴리고, 목발을 짚고 기우뚱거려도 승부욕에 찬 아이들의 진지함이나, 즐거움에 활짝 핀 아이들의 모습은 그 어느 행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 된다. 활동에 많은 제한이 따르지만 소풍이나 현장학습은 아이들에게는 기다려지는 교육활동 중의 하나이다. 물론 선생님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한 아이들도 많아 선생님들의 많은 노고가 따르지만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힘든 줄 모르고 아이들과 하나가 된다. 교외 학습 활동 때마다 왕왕 주위의 측은한 동정의 눈길을 받는 경우가 있어 마음이 아프지만 아이들의 웃음에 이내 우리의 얼굴도 웃음으로 젖어들고 만다. 그러나 항상 즐거운 시간만 있는 건 아니다. 신체적으로 허약한 우리 아이들의 특성상 자주 병치레를 하며, 한 번 아프면 그 정도가 심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허다하다. 숙직을 하다가도 기숙사에서 아이가 아프다고 연락이 오면 새벽에도 응급실로 데려가곤 한다. 지난 99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아이의 죽음은 내게 큰 상처와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내게 집착하다시피 하며 따르던 아이가 있었다. 20세가 넘은 나이의 여자 아이였으나, 정신지체로 상당히 낮은 정신연령으로 학업 수준 또한 현저히 뒤떨어지는 상태였다. 교실에서, 교무실에서, 심지어 화장실에 가면 문 앞에서 기다릴 정도로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라다니던 아이가 때론 귀찮아서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고등부 1·2학년 때 담임을 했던 나는 그 아이에게 전부가 되었던 것 같다.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노라면 전화를 걸어 한참 동안 무슨 말이건 하곤 했다. 그 아이가 고등부 3학년에 진급할 때 나는 다른 반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따라다니는 건 여전했다. 오죽하면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그 아이의 애인이라고 놀려댔을까? 그 말이 그 아이에겐 듣기 좋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 선생님이 내 애인이다'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알아보니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으면 구토를 하기 때문에 통 먹지도 못하고 말라 간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도 특별한 병명을 모르겠다며, CT촬영이나 MRI촬영을 해도 원인을 알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신경 정신과에 입원시켜 약물 치료를 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입원한 지 한 달 가량 되었을까? 그 아이의 병실을 찾아갔다. 병실을 들어서는 순간 '선생님'하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그건 차라리 절규라 할 정도의 부르짖음이었다. 어느새 조용하던 병실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시선이 나와 그 아이를 번갈아 가며 꿰뚫고 있었다. '그리도 반가울까?'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창피하기도 했으나, 나를 반기는 아이의 마음에 그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내 손을 꼭 쥐며 하는 한 마디에 심장이 멎으며 목구멍까지 치솟는 감격-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듯한-을 느낄 수 있었다. 병실을 찾은 지 약 일주일 후 그 아이는 퇴원을 하고 나왔으나, 너무 야위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힘없이 의자에 앉아만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선생님'하고 뛰어들며 나를 붙잡고 흔들어대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눈물을 훔치곤 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원을 했고, 병명조차 몰라 제대로 치료도 못해 보고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죽음의 소식을 접하는 순간 모질게 대했던 생각만이 견딜 수 없는 구렁텅이로 나를 내몰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는 말만 속으로 되풀이하며, 죽은 모습조차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구고 용서를 구할 뿐이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엔 이해도 사랑도 아닌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 포근함을 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 아이의 죽음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나에게 따뜻한 가르침을 준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라는 절규는 차라리 아름다운 웃음이라 생각한다. 서광리 | 우석대학교 특수교육과를 졸업하고 동암재활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록